*본 수필은 <주간 유비> 연재를 준비하며 있었던 일을 쓴 내용입니다.
유비
진짜라니까. 나 진짜 딱 1명만 구독해도 글 쓸 거야. 그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안 하고 글 쓸게. 나는 글 쓸 때 너무 행복해. 정말이야.
<주간 유비>를 준비하며 내가 여자친구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단 한 명도 구독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9월을 앞둔 기분 좋은 저녁, 구독 신청을 마감시켰다. 7일간 구독자를 모집했는데, 그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어떤 독자는 자신이 구독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내 메일을 스팸 함으로 넣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첫 수필 발행일로부터 7일 전 정도에 구독 신청을 받기로 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구독 신청서를 보내주셨다. 막상 구독자가 생기니 왜 구독하셨을지 참 궁금해졌다.
속아볼 만한 포스터 때문이었던지, 그렇지 않다면 독자님은 세상에 호의적이고 선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모든 독자분들에게 일일이 구독한 이유를 묻고 싶을 만큼 감사한 마음이 크지만, 앞으로도 나는 구독자들의 구독한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구독한 이유도 중요하지만, 구독자가 구독할 만한 글을 쓰는 것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괜찮은 글을 쓰는 것은 본질적이고 그 외의 것은 표면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글이든 나 자신이든 나는 꾸미기보다 존재함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려 한다. 유비가 본질을 잃지 않는다면 <주간 유비>의 연재는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만약 내가 정말 정말 특별한 사정으로 또는 정말 정말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재를 멈춘다는 공지를 한다면, 구독자분들이 꼭 그 공지를 신랄하게 질타해주시길 한 편으로는 바라고 있다. 필터 없는 거친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구독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할 생각이다. 건강한 소통을 위해서는 장애물이 없어야 하고 소통의 방법은 쉽고 간편해야 한다. 구독자분들은 나의 수필을 읽은 직후 이메일로 피드백을 줄 수도 있다. 또,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글에 대한, 인생에 대한 자유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그냥 늘 그 자리에 있는 편안한 곳이 되고 싶다. 또한, 좋은 커뮤니티는 좋은 말만 오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장을 건강한 커뮤니티라고 하자. 단, 가족을 건드리는 것은 반칙이다. 나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다.
<주간 유비>를 준비하며 꽤 많은 질문을 받았다. 혹자는 “다음 달은 <주간 장비>인가요?”, 또 다른 사람은 “내년엔 <주간 제갈량>인가요”, 라던지 “삼국지 유비의 이야기인가요.” 같은 질문들을 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수 있는 내 본명 유비가 참으로 만족스럽다. 특색이 없이 지루한 이름이나, 발음이 어려워한 번에 이름을 전달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름보다는 사람들이 장난을 좀 치더라도 발음이 쉽고 기억에 남는 ‘유비’가 좋다. 가끔은 유비, 관우, 장비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면 아쉽기도 하다. 나는 내 이름에 그런 미운 정 같은 것이 있다. 독자분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답하자면, <주간 장비>, <주간 조조>는 연재 예정에 없다. 그런데 유비의 이야기를 수필로 서술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자. 좋은 소통의 장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있는데 그중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어떤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한다.’ 일 것이다.
나는 지금껏 글을 써오던 사람이었는데, 주로 사업적인 이유로 칼럼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을 썼다. 글은 개인적인 사업에만 활용했는데,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럴 순 없지만, 책으로 낸다면 3권 정도의 분량일 것이다. <주간 유비>를 준비하며 그간 내가 써온 글들을 훑어봤는데, 내가 그렇게나 많은 글을 옮기거나 번역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남의 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행위들이 있는데,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하면 그것은 ‘나’에게 쌓이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글 수업 한 번 들은 적 없지만, 그렇게 세계적인 석학들과 성공자들의 글을 옮기고 베끼며 글을 배웠다. 그 때문에 앞으로도 남의 글을 옮기고 번역하는 일을 쉬지 않을 예정이다. 내게는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요령이 있다. 나는 항상 남의 글만 써왔던 것은 아닌데, 그래도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강의를 위해 원고를 썼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의 짧거나 긴 강의를 들어주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건 대학 시절이다. 글쓰기는 더 일찍부터 시작했는데, 대학생 때 논문을 쓰면서 미친 사람처럼 희열을 느꼈다. 나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만, 금방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는 논문 쓰기가 그렇게 재밌었다. 주장을 정하고 길고 긴 글을 통해 나의 주장을 설득하고 증명하는 일. 긴 글이 내가 설계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순간 나는 희열을 느꼈다. 너무 재밌어서 다른 학과 석사 논문을 번역해주기까지 했다. 그때 나는 진짜 또라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떳떳하게 페이를 요구했다. 중국어에서 한국어로 번역을 해주고 50만 원을 받았다. 아무래도 노동을 지불하고 대가를 획득하는 행위는 보호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노동한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획득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수고한 자신의 몸을 위해서다. 마음으로는 대가를 사양할 수도 있겠지만 육체 그 자체로는 거절하거나 승낙하는 등의 결정을 할 줄 모른다. 둘째는 내가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때 대가를 받아야 할 다른 사람들이 올바른 대가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대가를 거절할 수는 있지만, 자칫 동종업계의 다른 사람들까지 강제로 봉사시키는 수가 있다. 남을 돕는 행위는 당연한 일이지만, 선택이다. 세 번째 이유는 대가를 지불했을 때 그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나의 노동이 올바른 가치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떻게 논문이 재밌을 수 있어? 너 또라이 아니냐?” 같은 말을 듣기 싫을 때이다. (그것은 내가 실제로 들은 말이다)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냐’,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냐’와 같은 질문을 들을 법한 대부분의 행동은 “나 이걸로 돈 버는데?”라고 말하면 그 누구도 납득하는 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그래서 나는 논문 번역비를 요구했다.
남의 글만 쓰던 나에게 주변에서 여러 번 제안을 해주셨다. 너의 글을 써보는 게 어떻냐고. 나는 내 이야기를 글로써 볼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주간 유비>를 시작으로 데이비드 소로의 말처럼 남의 생활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만 하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해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본문 중.
아니, 진짜라니까. 정말로 구독한 사람이 있다니깐!
본 에세이는 독자님의 관심을 받아 쓴 글입니다.
남은 하루, 한 편의 글로 영감을 얻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