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1학년 기숙사 퇴소

by 행당동 살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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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안, 구겨진 종이봉투 하나와 큼지막한 오렌지색 가방이 놓여 있다. 한쪽에는 기숙사 생활 동안 썼던 냄비며 접시, 생활용품이 담겨 있고, 다른 쪽에는 옷가지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 사진만 보면 누군가 이사를 가거나 잠시 짐을 옮기는 평범한 순간 같지만, 내겐 이 장면이 그저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저 짐들은 둘째가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첫 학년의 기록이고, 동시에 아직 해결되지 못한 현실의 무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난 1년 동안 낯선 나라에서 홀로 기숙사 생활을 해냈다. 공부의 강도는 높았고, 친구를 사귀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차근차근 적응했고, 국제적인 친구들과 함께 팀 과제를 해내고, 발표를 준비하면서 조금씩 성장해왔다. 부모인 우리가 멀리서 보기에도 분명 대견한 한 해였다. 그러나 학기가 끝나고 맞이한 현실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바로 ‘집’이었다.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에서 집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전쟁에 가까운 일이다. 기숙사는 1학년까지만 제공되는 경우가 많고, 그 이후에는 스스로 방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방은 늘 부족하다. 방이 나온다 해도 임대료는 한국 기준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고, 계약 조건도 까다롭다.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 집주인이나 중개인이 학생들에게 차별을 두기도 한다. ‘비유럽 학생은 안 된다’, ‘1년 이상 계약만 가능하다’, ‘추천인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들이 붙는다. 이런 장벽은 어린 유학생에게 결코 만만치 않다.



둘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기가 끝나고 기숙사 방을 비워야 했지만, 아직 새 학기를 맞이할 집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기숙사 짐을 정리해 아는 언니네 집에 잠시 맡기게 되었다. 사진 속 종이봉투와 오렌지 가방은 바로 그 과정의 한 장면이다. 임시로 짐을 옮겨두고, 정작 아이 자신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해도 집을 구하지 못하면 네덜란드로 발을 디딜 수조차 없는 현실. 부모로서는 그 상황이 안타깝고, 또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둘째는 성실하게 공부했고, 국제적인 친구들과도 교류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집 문제는 그 모든 노력과는 무관하게, 아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환경의 벽 앞에서, 부모는 그저 기다리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보면 유학을 준비할 때 가장 크게 걱정했던 건 공부였다. 과연 아이가 높은 학업 강도를 버틸 수 있을까,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적응할 수 있을까 같은 문제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 아이를 가장 크게 붙잡은 건 ‘공부’가 아니라 ‘집’이었다. 의외지만,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사진 속 짐들을 바라보며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종이봉투 속에 구겨져 들어간 플라스틱 그릇, 아직 다 쓰지 못한 생활용품들, 오렌지 가방에 차곡차곡 담긴 물건들. 그것들은 단순한 짐이 아니라, 둘째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흔적이었다. 수많은 과제와 발표로 지새운 밤, 서툰 솜씨로 해먹던 소박한 식사, 외로움을 달래주던 친구들과의 작은 대화들. 그 모든 순간이 저 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짐은 불확실한 미래의 상징 같았다. 맡겨놓은 짐은 언젠가 다시 찾아야 한다.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학기를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그때 과연 아이가 안정적인 집을 구할 수 있을까? 혹여 집이 늦게 구해져 수업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까? 부모로서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인터넷으로 암스테르담의 집 정보를 찾아보기도 하고, 현지 사정을 아는 지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당장 집을 직접 알아봐줄 수도, 계약을 대신 해줄 수도 없다. 아이가 스스로 부딪히고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찍은 저 사진은 짧은 순간을 담고 있지만, 내겐 그 순간이 길게 남는다. 짐을 옮기는 일상의 장면 뒤에, 유학생활의 현실과 부모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짐을 내려놓고 돌아서야 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괜스레 마음이 저릿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믿는다. 이 과정 또한 아이를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언젠가 저 오렌지 가방을 다시 열어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부모의 마음은 오늘도 아이 곁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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