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하인에서 장보기

by 행당동 살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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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본다는 것은 삶을 사는 일이다. 먹을 것을 고르고, 그 먹을 것을 삶 속에 배치한다. 낯선 도시의 기숙사, 좁은 부엌의 선반 위, 차가운 냉장고의 서랍 안에 채워 넣는다. 유학생의 장바구니는 그가 어떻게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준비하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사진 속에는 소시지와 치즈가 있다. 초콜릿이 있고, 버섯과 양상추가 있다. 그리고 시리얼과 우유, 달달한 팬케이크와 과자 봉지들이 있다. 장바구니는 단출하지 않고, 허술하지 않다. 채워야 한다는 의지로 꽉 들어차 있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며 아이의 손끝에서 고른 물건 하나하나를 따라간다. 손이 머뭇거렸을 딸기 한 팩, 가격표를 보고 잠시 멈추었을 치즈, 무겁지만 필요한 우유 한 통. 거기에는 스스로 책임지는 삶의 무게가 배어 있다.



장은 보는 것이 아니라 고르는 일이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으로 내일을 버틸지 고른다. 부모가 대신 채워주던 냉장고와는 다르다. 아이는 이제 스스로 자기 삶의 빈칸을 채운다. 배고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설계한다. 장바구니에 담긴 소시지는 고독을 씹는 저녁이고, 딸기는 외로움을 달래는 디저트다. 시리얼은 빠른 아침을, 라면은 그리운 밤을 대신한다. 먹을거리의 나열은 곧 삶의 서술이다.



나는 한국에서 둘째가 보내온 사진을 본다. 낯선 유럽의 슈퍼마켓에서 찍힌 물건들이 내 눈앞에 있다. 아이가 살아가는 증거다. 기숙사 부엌에 놓였을 풍경을 상상한다. 작은 프라이팬 위에서 소시지가 익어가는 소리, 얇게 썬 양상추를 접시에 올리는 손길. 창밖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언어는 아직 낯설다. 그러나 아이의 냉장고는 점점 익숙해진다.



마음은 복잡하다. 장을 보는 아이의 모습이 대견하다. 그러나 동시에 서글프다. 내가 대신 채워주던 그 많은 것들을 이제는 스스로 해야 한다. 유학생활은 공부만이 아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아침을 맞는 일상 자체가 공부다. 아이는 장을 보며 배운다. 어떤 치즈가 더 오래 가는지, 어떤 야채가 더 신선한지, 어떤 우유가 입에 맞는지. 그것은 교과서에 없는 배움이다.



나는 아이의 사진을 기록으로 받는다. 아마 아이도 알 것이다. 사진을 보내는 순간, 부모는 안심한다. "나 잘 지내고 있다." 그 말이 물건들 사이에 숨어 있다. 사진은 보고서이고, 보고서는 안부다. 그 안부 속에 나는 아이의 두려움을 본다. 기록은 불안을 지우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어 보내며 아이는 스스로 다독인다.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내가 여기 있다고, 잘 버티고 있다고, 증명한다.



장을 보는 일은 생존이고, 문화다. 한국에서는 부모가 늘 냉장고를 채워주었다. 밥상 위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아이는 빈틈을 채운다.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내일 아침에 무엇을 준비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그 결정은 곧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선택이다.



장바구니를 오래 들여다본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의 성장이고, 독립이다. 나는 문득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언제 장을 보기 시작했는가.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시장에서 무언가를 고르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아이의 사진은 나의 오래된 기억을 흔든다.



사진 속 딸기는 붉다. 그 붉음 속에 아이의 건강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그 딸기를 오래 바라본다. 초콜릿은 달콤하다. 그러나 그 달콤함 속에 잠깐의 위로가 있다. 나는 아이가 초콜릿을 뜯으며 웃는 얼굴을 상상한다. 라면은 한국이다. 그 낯선 땅에서 라면은 고향의 냄새다. 끓는 냄비에서 김이 올라올 때, 아이는 잠시 귀국한다.



부모의 시선은 늘 그리움과 불안 사이를 오간다. 사진 속 장바구니는 안심이자 그리움이다. 아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이자, 내가 옆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양가감정을 안고 산다.



비워진 음식은 또다시 채워질 것이다. 먹고 비우고 다시 채운다. 아이는 그 과정을 반복하며 어른이 된다. 부모는 멀리서 그 과정을 지켜본다. 사진 속 장바구니는 단순한 소비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독립의 선언이고, 성장의 문장이다. 장바구니는 비워지고 다시 채워질 것이다. 아이의 삶도 그럴것이다. 나는 끝없이 그 과정을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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