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유학길에 올라간 지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암스테르담의 낯선 기숙사, 낯선 음식, 낯선 수업 속에서 녀석은 그럭저럭 자기만의 생활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의 눈에는 아직도 철없어 보이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부딪히며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단단해져 가는 듯했다.
어느 날, 둘째가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푸른 잔디밭 한가운데 나무 기둥에 붙어 있는 표지판. 빨간 원 안에는 개 그림과 함께 “Verboden voor honden”라는 문구가 있었고, 그 아래 파란색 표지판에는 “Rookvrij”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네덜란드어라 무슨 뜻인가 싶어 물으니, 둘째가 설명을 덧붙였다. 위쪽은 ‘개 출입 금지’, 아래쪽은 ‘금연 구역’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짧고 단순한 표지판. 그러나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많은 생각에 잠겼다.
한국의 공원을 떠올려 보았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 옆 벤치에는 담배를 피우는 어른들이 앉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미끄럼틀 근처 풀밭에는 반려견이 뛰어다니며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일지 몰라도, 어린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때가 많다. 담배 연기를 피해 자리를 옮기고, 아이가 잔디밭에 눕지 못하게 말리며, 강아지가 다가오면 조심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네덜란드의 공원은 조금 달랐다. 그 작은 표지판은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이곳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니 흡연도, 반려견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금지가 아니라, 다수가 안전하고 쾌적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배려였다. 담배 연기를 마시지 않고 마음껏 숨을 들이쉴 수 있고, 풀밭 위를 뒹굴어도 개의 배설물이나 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 그 단순한 규칙이 만들어내는 환경은 아이들에게 가장 건강한 ‘공원’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공원도 이런 식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규제와 금지는 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공원이라는 공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아이와 시민들이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자유를 양보하는 문화. 그 작은 불편이 쌓여 결국 더 큰 쾌적함을 만들어 내는 사회.
둘째는 사진만 보내고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표지판에서, 아이가 멀리서 배우고 있는 한 조각의 사회적 규범을 읽을 수 있었다. 유학은 단지 영어로 수업을 듣고 전공 지식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다. 낯선 도시의 생활 속에서, 그 나라의 규칙과 질서 속에서, 다른 문화가 어떻게 일상과 맞물려 있는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둘째가 찍은 그 사진 한 장은 어쩌면 강의실에서 배우는 어떤 개념보다도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녀석은 분명히 깨닫고 있을 것이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각자가 작은 부분에서 양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본다. 초록빛 잔디가 무성한 한가운데, 조금 낡고 투박한 나무 기둥. 그 위에 붙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작은 표지판. 한국이었다면 쉽게 지나쳤을 풍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그 이미지는 낯설게 다가오며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