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집에서 살다가 기숙사에서 낯선 사람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변화다. 처음엔 단순히 방을 함께 쓰는 일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공유’가 아니라, ‘생활의 충돌’이다.
첫째도 둘째도 둘 다 깔끔한 편이다. 집에서도 늘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고, 옷이며 책이며 제자리에 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기숙사 생활이 시작될 때도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적응만 잘 하면 문제 없겠지 싶었다.
둘째의 작년 룸메이트는 슬로바키아에서 온 여자아이였다. 짐을 가져다주러 갔을 때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전형적인 유럽의 미인상이었다. 얼굴은 작고, 키는 크며, 피부는 눈처럼 하얬다. 둘째 말로는 “밤마다 놀러 다니느라 늘 피곤해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둘 다 성격이 원만해서인지 큰 마찰은 없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나 부엌에서도 별문제는 없었다. 소음도 거의 없었다. 나름 서로의 생활 리듬을 존중했던 것이다.
첫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첫째의 룸메이트는 한국인이다. 나는 처음엔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언어의 장벽도 없고, 서로의 정서를 이해하기도 쉬울 테니까. 하지만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서 반드시 ‘편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청결의 기준, 정리의 기준, 소음의 기준이 다르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그래도 두 달이 지나도록 별다른 트러블 없이 지낸다니 다행이다. 적응이란 결국 자신이 기준을 조금씩 조정해가는 과정이니까. 누구의 방식이 옳고 그르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 첫째 창문 사진을 보냈다.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창문 밖으로는 암스테르담의 평화로운 캠퍼스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에는 묘한 반전이 있었다. 창문 한쪽에, 샤워볼이 걸려 있었다. 둘째가 그걸 보고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언니 창문에 샤워볼이 매달려 있어. 저게 왜 거기서 나와?”
정말 뜻밖의 장면이었다. 예쁜 풍경 속 샤워볼이라니. 그런데 첫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 납득이 되었다. “화장실에 두면 잘 안 말라서 냄새가 나. 그래서 창문에 말리는 거야.” 습한 네덜란드의 공기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둘째의 반응은 여전히 신기함 그 자체였다. “아니, 그래도 창문에 걸 필요까지는 없잖아.”
첫째의 샤워볼은 어쩌면 ‘깔끔함의 확장된 형태’일지도 모른다. 냄새를 없애고 싶어서, 곰팡이를 방지하고 싶어서 택한 나름의 방식. 하지만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비정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공유 공간의 철학’이 가지는 복잡함이다.
사람마다 청결의 기준은 다르다. 누군가는 책상이 완벽히 정돈되어야 마음이 놓이고, 누군가는 어질러진 상태가 오히려 창의력을 자극한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기를 완벽히 닦아내야 안심하고,누군가는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거니까’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첫째는 분명 전자의 부류다. 남에게 피해 주기 싫고, 내 물건이 깨끗하게 유지되길 바란다. 그래서 샤워볼이 창문으로 이사 갔다. 그게 다소 이상해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다면 괜찮은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샤워볼이, 삶의 상징이 된다. 그 작고 둥근 물건 하나가, 첫째가 어떤 성격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기숙사 생활은 어쩌면 그런 깨달음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생활방식에 놀라고, 때로는 이해하려 애쓰고, 그러면서 자신의 기준을 조금씩 바꿔나간다. 첫째의 창문에 걸린 샤워볼은 그 적응의 상징이다.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타협하는 법을 배우는 것.
둘째는 여전히 그 사진을 ‘코믹한 사건’으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성숙의 풍경’으로 기억하려 한다. 삶이란,
결국 창문에 무엇을 걸어두느냐의 문제다. 누군가는 화분을, 누군가는 사랑과 낭만을, 또 누군가는 샤워볼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