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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 장 피에 드 포르

부자의 산티아고 순례길

by 생각은스파게티


TGV 출발 시간이 임박해 황급히 열차에 탑승했다. 정신 없이 자리에 갔더니 우리 자리에 웬 중년 부부가 앉아 계신게 아닌가? 둘 다 표를 들고 진짜를 가려내고자 했다. 근데 내가 봐도 두 좌석 다 동일하게 맞는 것 같은데… (TGV 예약 시스템 이거밖에 안되나요?!!)

그나저나 애플 월렛에 티켓을 담아두니 넘 편하네

알고보니 그 분들이 환승 이후에 옮길 좌석이 우리와 동일한거였다. 멋쩍게 웃으시며 자리를 비켜주시니 다행이었다. 이런 작은 사건에도 가슴이 철렁하는걸 보면 영락 없는 이방인이다.


그 와중에 어떤 청년이 먼저 다가와 영어로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봐주었다. 나도 이런 친절을 머금은 사람이 되어야지.

보르도 역에서 건너편 자리에 할머니가 탑승했다. 마른 체형에도 큰 가방을 매고 쩔쩔 매시는 모습에 우리처럼 생장으로 가신다는걸 대번에 알아챘다. 몸에 비해 가방이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괜찮으시려나.


나도 순례길을 간다며 아는채를 했더니 가방 몇kg냐고 물어보시네. 역시 가방 몇키로인지가 이곳의 인사이자 최대 관심사이다. 할머니는 9kg시라고 한다.


할머니는 낭트에 사신다고 한다. 역시 순례길은 처음이라고 하시니 더 반갑다. 매일 2000명이 넘는 순례자가 방문한다고 숙소를 잘 구해야 한다고 하신다. 2000명이라니..! 거대한 축제에 참가하는 것 마냥 설레었다.


처음 만나는 순례길 친구가 반가워 통성명을 했다. 할머니의 이름은 브리짓. 역시나 내 이름을 어려워하시네.

식당 칸에 잠시 들러보았다.


바욘 역에서 TGV를 내려 작은 완행 열차로 갈아탔다. 열차에는 드디어 온 동네에서 모인 순례객들로 가득했다. 아마 내일 모두가 같이 출발하는 사람들이겠지. 모두가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오며 가며 마주칠 일이 많다고 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새학기가 되어 같은 반 친구들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이 완행 열차에서 Y형님을 처음 만났다. 옆자리에 앉아 계신 아시아 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빠와 나누는 대화를 관심있게 듣고 계시다가 한국어로 물어보셔서 깜짝 놀랬다!


이번 여행에서 꼭 보고싶은 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특히 어느 마을에는 가우디가 지은 성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바르셀로나에 가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게 못내 아쉬웠는데 작은 위로가 됐다.



생 장 피에 드 포르
Saint-Jean-Pied-de-Port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 중 처음으로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했다. 바로 뒤에는 Y형님까지 우리 세 명만 있었다. 이내 오피스 뒤로 긴 줄이 이어졌다.

드디어 생장 피에 드 포르 역에 도착!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가 되었다. 사무소에는 봉사자 분들이 각자 할 수 있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들어가는 순서도 제각각이다.



크레덴셜 발급


이곳에서는 순례자임을 인증하는 크레덴셜을 발급받는다. 접어서 가지고 다니는 수첩인데 여행 중 곳곳에서 받는 도장(sello)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가방에 매고 다닐 가리비도 골랐다.

순례자 사무소를 나서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우비를 꺼내 입으려는데 아빠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55번 알베르게에 가보자고 하신다. 나는 사무소에서 봉사자 분이 55번 알베르게가 이미 만실이 됐다며 43번 알베르게에 가는 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 아빠는 유튜브에서 미리 공부해온대로 여행을 만들어 나가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혼란스런 상황에 놓여졌을 때, 아빠와 대화를 통해 답을 찾기까지 해야 하니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백팩의 방수 커버를 씌우면서도 잘 말씀드려서 결국 43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우비를 걸치긴 했는데. 온몸이 반쯤 젖어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 벌어질까? 위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

43번 알베르게는 특이하게 짐 놓는 공간이 침실과 분리되어 있다.

43번 알베르게 사장님은 지켜야 할 규칙을 하나씩 엄격하게 설명했다. 흡사 논산훈련소에 돌아온 줄.


긴 설명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거의 마지막 손님이라 각자 다른 2층 침대에 배정받았다. 이제야 잠시 숨을 돌린다. 그래도 이곳은 저녁과 아침을 모두 같이 먹는다고 하니 기대가 됐다.



짐 정리 후 다시 동네를 거닐어 본다.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동네 느낌이자 우리들의 태초마을!



저녁 시간이 되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식사는 기대 이상이었다! 콥 샐러드 - 퀴노아 & 라따뚜이 - 믹스 과일로 이어지는 3코스에 와인까지 있었다.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해 음식을 리필해서 더 먹었다. 가정식을 나눠 먹으니 이분들의 집에 온 손님이 된 기분이다.


오늘은 알베르게 운영을 돕는 봉사자 두 분이 12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영영 은퇴하는 날이다. 그 분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한 말씀 듣기 시작하는데… 프랑스어로 말씀하면 벨기에 아저씨가 영어로 통역하고, 나는 그걸 다시 아빠에게 한국어로 통역하는 상황 발생..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하듯이 정보가 점점 짧아지고 뒤죽박죽이 된다. 점점 대화가 길어지니 끄트머리에는 한 문단이 마디로 줄어드는 기적의 압축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다 같이 프랑스어로 성가도 불렀다

사장님이 내일의 경로와 팁을 알려주는 시간도 있었다. 갈림길과 푸드 트럭 정보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더 꼼꼼히 알려주시려는 거겠지. 대대장님 같았던 사장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특히 유용했던 정보는 빨간색과 흰색의 두 줄이 있는 표식을 따라가라고 했다. 노란색&빨간색은 절대 안됨! 직진, 우회전, 좌회전, 못가는 길(X)도 표현하고 있다네.


앞서 번역을 해주기도 했던 벨기에 아저씨는 이미 4번째 카미노이고, 심지어 이번에는 산티아고도 안가고 프랑스 길을 돌거라고 한다. 여러므로 짬바가 느껴지는게, 특히 샤워할 때 ‘슈퍼 콜드 워터’로 10분간 발을 쿨다운 시켜주라는 팁이 앞으로 큰 도움이 될듯 하다.

10시가 되니 정말 칼같이 누워 주무시네들~ 이곳 생활은 아직 적응할게 많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정말 코 앞에 다가왔다.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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