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투자, 아버지의 기준
투자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그림
대화가 깨지는 순간은 대개 한 가지다. 의견이 갈리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누가 맞나”로 달려간다. 다름은 비교할 일이지 판결할 일이 아닌데, 말은 자꾸 심판봉을 쥐게 된다. 그때부터 대화는 이해가 아니라 재판이 되고, 말은 다리가 아니라 무기가 된다. 관계가 상처받는 이유는 내용보다 태도 때문이다. “틀렸다”는 한마디가 대화의 문을 닫곤 한다.
그래서 먼저 구분해야 한다. 다름과 틀림은 엄격히 다르다.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경험이 다르면 기준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면 같은 사건도 다르게 보인다. “신중하게 가자”는 사람은 위험을 먼저 보고, “일단 해보자”는 사람은 기회를 먼저 본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게 아니라, 둘 다 자기 삶이 만든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건 반박이 아니라, 질문이다. “왜 그렇게 보셨어요?” “그 기준은 어디서 왔어요?” 질문은 상대의 방어를 내리고, 대화를 다시 사람 쪽으로 돌려놓는 방법이다. 반대로 “그건 아니지”로 시작하면, 대화는 진실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구분이 필자에게는 아주 익숙하다. 필자가 7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만나는 해군 OCS 68차 영남 동기회 모임이 있다. 동기 20여 명이 두 달에 한 번씩 만나 밥을 먹는다. 건강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집안일로 속이 무거운 날도 있고, 젊은 시절 장교 훈련의 고생담이 웃음과 함께 나오기도 한다. 자녀와의 갈등도 숨기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 맺는 인연보다 오래 쌓인 관계가 귀해진다. 이 모임은 필자에게 삶의 “정기 점검”이 되는 자리다. 서로를 꺾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조금씩 새로 고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토요일, 그 ‘새로 고침’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Y 동기가 조심스럽게 고민을 꺼냈다. 40대 초반 아들이 주식 투자로 돈을 조금 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돈은 땀 흘려 벌어야지. 단기 투자로 쉽게 벌려고 하면 안 된다.” 말은 거칠었지만, 속은 아들이 걱정됐던 것이다.
그 동기는 철강 분야에서 40여 년 일했다. 공정이 있고, 현장이 있고, 품질이 있고, 납기와 책임이 있는 분야에서 말이다. 무엇이 가치인지 눈으로 확인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매매 차익’은 너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었다. 눈앞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는 일은 생산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아들의 행동을 보기 전에, 아버지의 삶이 먼저 판단의 잣대를 세운 셈이다.
여기서 대화는 두 갈래로 갈라질 수 있다. “주식은 도박이다/아니다”로 갈라져 서로를 판정하며 끝내는 길. 아니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두고 다투는가”를 먼저 정리하는 길로. 다행히 그날 모임은 두 번째 길을 택했다. 우리는 주식시장에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작전 세력도 있고, 투기꾼도 있고, 정치적 변수에 휘청거리는 장면도 있다. 그래서 결론이 이렇게 모였다. 문제는 “주식이 나쁘냐 좋으냐”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정당성을 판단하느냐”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논의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바름과 틀림은 기준이 있을 때만 말할 수 있다. 사실 문제라면 데이터와 근거가 기준이고, 약속 문제라면 합의한 규칙이 기준이다. 윤리 문제라면 피해와 책임이 기준이다. 그러니 주식 투자도 감정과 도덕을 한 덩어리로 붙이면 대화는 막힌다. 대신 기준을 세우면 길이 열린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는 어디인가”, “가계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는 어디까지냐”, “정보를 어떻게 검증하냐.” 이런 질문은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행위를 판단할 기준을 만든다. 그 순간 싸움이 조정으로 바뀐다.
누군가가 결정적인 말을 보탰다. “주식시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금이 모이고 흘러가는 정상적인 통로다.” 기업은 주식을 발행해 자본을 모으고, 그 돈으로 설비를 늘리고 연구개발을 하고 사람을 뽑는다. 개인의 매수는 단순한 ‘돈 걸기’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기업의 가능성에 자금을 보태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이 말은 아버지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결해 줬다. 생산 활동의 형태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듯, 경제 활동의 정당성도 “형태”보다 “책임”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쪽으로 논점이 옮겨갔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해졌다. “주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책임 있게 하느냐 아니냐”였다.
결론이 바뀌니 감정이 달라졌다. 그 동기는 여러 의견을 들으며 자신의 기준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날 즈음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 주식 투자로 “약간의 성과”를 냈다고. 처음엔 못마땅했던 일이, 결국은 아들 자랑이 됐다고. 그러고는 2차로 간 카페에서 맛잇는 빵을 쐈다. 그 빵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진 건, 단지 맛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기는 대화’를 버리고 ‘살리는 대화’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상대를 꺾는 승리가 아니라, 관계를 살리는 승리였다.
필자는 지금도 생각한다. 40대라면, 책임 있게 살고자 한다면, 주식시장을 무조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양한 정보를 분석하고, 기업의 실적과 산업의 흐름을 읽으며, 당당히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기준은 분명해야 한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는 삼가야 한다. 그 욕심은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고, 결국 개인의 생활 기반까지 흔들 수 있다. 반대로 여유자금 안에서, 생활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저축하듯 꾸준히 투자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경제 활동이 될 수 있다. 같은 주식이라도 기준이 다르면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날 모임에서 필자가 배운 것은 주식의 정당성만이 아니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맞고 틀림’의 판결보다, 서로 다른 시대감각을 조정하는 대화라는 사실이었다. 철강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기준도 존중받아야 하고, 정보와 자본이 빠르게 흐르는 시대를 사는 아들의 방식도 이해받아야 한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은 결국 말(소통)이고, 말의 핵심은 질문이다. 두 달에 한 번씩 얼굴을 맞대며 만나는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생각을 넓힌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증거가, 그날 카페의 빵 한 조각처럼 따뜻하게 나왔다. 다름을 틀림으로 몰지 않고, 바름을 기준으로 세워 가는 대화가 아직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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