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에게 남을 것은 사랑뿐이다

동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by 이천우

이제 우리에게 남을 것은 사랑뿐이다


멸종위기 동물들은 절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일전에 진해야외공연장 전시실에서 개최되고 있는 ‘멸종위기 동물 특별展’을 관람하고 왔다. 입구에 걸린 포스터가 전시의 결을 먼저 말했다. ‘아름답고 슬픈 지구촌 멸종위기 동물 이야기.’ 그리고 한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우리에게 남을 것은 사랑이야.”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건 하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

전시장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띈 것은 표현 방식이었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은 이미지, 빛, 화면, 조형을 엮어 최신 디지털 기술을 자연스럽게 잘 융합하고 있었다. 이제 예술이 기술을 쓰는 일은 특별한 시도가 아니라, 현실을 더 정확히 드러내기 위한 한 가지 언어처럼 보였다. 다만 그 기술이 가리키는 끝은 늘 같았다. “사라져 가는 생명”이었다.


전시는 동물을 단순한 ‘볼거리’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앞에 선 인간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했다. 파란 벽에 걸린 북극곰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고드름이 길게 매달려 있었고, 눈가 한쪽에는 붉은 하트 모양이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장식이라기보다 “여기까지 왔다”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기후’ 같은 단어보다 먼저, 한 생명의 얼굴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붉은 벽의 부엉이도 마찬가지였다. 큰 눈이 정면에서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 눈빛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인간이 개발과 조명으로 밤을 바꿔 놓는 동안, 이 생명은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 파란 벽의 표범은 얼굴에 꽃잎과 잎사귀가 더해져 있었는데, 그 장식이 오히려 상처를 가리는 붕대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이 짙어질수록 “이 아름다움이 오래 갈까”라는 불안이 따라왔다. 나는 그 불안을 감상으로 덮고 싶지 않았다. 불안은 대개 현실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전시장 마지막 공간에는 작은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모래 위에 두 발로 선 미어캣은 작은 몸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레서판다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야생이라는 말보다 ‘경계’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정들이었다. 살아 있다는 일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한 긴장으로 바뀐 듯했다. 나는 그 표정들이 낯설지 않았다. 우리도 어떤 불안 앞에서는 비슷한 얼굴을 한다.



한 공간에는 수달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앞발을 든 수달, 몸을 세운 수달, 옆으로 누운 수달. 그중 한 수달은 유난히 사람처럼 서 있었다. 작가가 자신을 수달에 담아 세워 둔 듯한 모습이었다. 귀엽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앞에서 질문이 먼저 나왔다. 이 수달들이 원래 있어야 할 강과 물가가, 지금도 제자리에 있는가. 작품이 남긴 것은 감상이 아니라 물음이었다.



또 다른 공간에는 코끼리가 있었다. 커다란 귀와 긴 상아가 정면으로 다가오고, 아래쪽에는 작은 지구 이미지가 놓여 있었다. 화면의 크기와 지구의 작음이 대비되면서,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행성이 얼마나 위태로운 바닥 위에 놓여 있는지 실감이 났다. 코끼리는 ‘거대한 동물’이 아니라 ‘거대한 부담’을 떠안은 얼굴처럼 보였다. 그 앞에서 나는 ‘보호’라는 말을 떠올렸다. 보호는 단순한 동정을 뜻하지 않는다. 관계를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시를 보고 난 뒤 내 생각은 멀리 가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발밑,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웅산을 오르며 웅산에 서식하는 생명체들과 공감하며 살아왔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냄새와 소리, 길가의 풀과 벌레, 새들의 움직임을 보며 “이 산은 내 산책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터”라는 감각을 조금씩 배워 왔던 것이다.


몇 년 전 웅산에 극한 호우가 내려 곳곳이 파이고 파괴되었다. 웅산 산책길이 무너지고 흙이 쓸려 내려간 흔적을 보면서, 인간이 자연을 ‘관리’한다고 말해도 자연은 자기 방식대로 버틴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 뒤의 정비 공사가 나를 더 안타깝게 했다. 작년에 웅산을 정비하는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산을 다시 파헤치고 허물어 인간 중심의 인공적인 시멘트로 많이 보완했다.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자꾸 한 가지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정비공사가 웅산의 구성원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시멘트가 깔린 길은 사람에게는 편하다. 미끄러질 위험도 줄고 관리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 살던 작은 생명들에게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 흙이 숨 쉬는 방식이 달라지고, 물이 스며드는 길이 바뀌고, 발 아래의 온도와 습도가 변한다. 나는 그 변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내가 편해진 만큼, 누군가는 자리를 좁혔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생각이 나만의 감상인지 묻고 싶어졌다. 내 편리함이 어떤 존재의 불편을 전제로 하는 순간이, 내 삶에도 분명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시에서 내가 반복해서 본 것은 동물들의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부르고 싶다. 거창한 비행이 아니라, 주저앉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은 먼 나라의 멸종위기 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르던 웅산의 작은 존재들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기고 숨어들며 버티는 몸짓으로.


나는 지금까지 인간 중심으로 다른 생명체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이제는 동물들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자고 다짐한다. 내가 안전과 편리를 말할 때, 그 말이 누구의 삶터 위에 놓이는지 한 번 더 돌아보는 것. 그것이 사랑의 출발점일 수 있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의심해 보는 일이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우리에게 남을 것은 사랑이야.” 나는 이제 그 말을 이렇게 바꿔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좀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첫걸음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하루에서 “우리에게 남을 것은 사랑이야”라는 문장이 실제 행동이 되는 순간은 어디일까. 오늘 내가 누리는 편리함이 다른 생명의 자리 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라도 바꿔 볼 수 있을까. 속도를 조금 늦추는 일, 선택을 한 번 더 점검하는 일. 그 작은 조정이 누군가의 자리를 지켜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 사랑은 큰 선언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 아닐까.


북극곰의 외침이 애처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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