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로서의 삶
《노년의 아침, AI와 함께 쓰는 인생 수필》
시리즈 소개
30대 초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 자신감으로 우쭐댈 때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자식을 떠나보낸 슬픔은 내 삶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그 우울을 딛고 겨우 서보려 할 때, 50대에는 위암 수술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를 만났습니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못했기에 교수로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시간도 있었다. 그렇지만 저술한 책이 우수학술도서와 세종도서로 선정되며 위로가 되었고, 정년퇴직 후 산행길의 들고양이들이 벗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늦깎이로 AI를 배우고 글을 쓰는 브런치 작가로 살아가는 나날.
이 시리즈는 나이 든 사람도 여전히 도전할 수 있고, 위로를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쓴 인생 수필입니다.
1회. 슬픔의 그늘, 30대에 아이를 잃고
나는 30대 초반, 해군 장교로 전역하자마자 국립창원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기세도 당당했고, 앞날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러나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셋째 아이를 잃는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날 이후, 내 삶의 색은 급격히 바랬다. 회복되지 않는 상실은 깊은 우울로 이어졌고, 슬픔의 그늘은 30~40대를 온통 덮어버렸다. 나뿐 아니라 아내 역시 하루하루를 우울증의 고통 속에서 버텨야 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실감, 삶을 향한 의욕마저 잃게 만드는 어둠. 교수라는 직함 아래에서 웃으며 강의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텅 빈 듯 공허했다.
현실의 무게도 가볍지 않았다. 전세살이를 끝내고 어렵게 분양받은 20평 남짓한 연립주택은 대부분이 은행 대출이었다. 부부의 월급 절반 이상이 매달 원리금 상환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니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팍팍한 삶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두 딸을 키우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내 어머니, 그러니까 아이들의 할머니께서 여러 해 함께 계시며 딸들을 돌봐주셨다. 어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자신의 젖까지 물리며 키우셨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허우적이던 우리를 대신해, 어머니는 자신을 내어주며 두 딸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셨다. 그 헌신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마음 이 짠하고, 너무나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묵묵히 버텼다. 아내는 중등학교 교사로, 나는 대학 강단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도 삶을 이어야 하는 고통은 컸지만, 아이들과 어머니의 존재가 우리를 다시 붙잡아주었다. 그 무거운 시간들은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고요한 토대가 되었다.
2회. 위암 수술, 삶의 전환점이 되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나는 재직 중인 대학에서 기획협력처장직을 맡아, 대학 예산과 장기 발전계획을 비롯해 이웃 경상대학교와의 통합 추진 업무를 도맡았다. 대학의 미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과업들을 감당하며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다. 특히 대학 통합 건은 단순한 행정 조정이 아닌 지역 사회와 구성원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얽힌 문제였기에, 갈등과 압박이 쉼 없이 몰아쳤다. 회의와 문서, 보고와 설득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2006년 하반기, 결국 통합 논의가 무산되었다. 몇 년을 걸쳐 준비하고 애써온 일의 결말치고는 너무 허무했고, 나는 마치 깊은 동굴에 갇힌 듯한 무력감과 탈진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떠도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고, 책상 앞에 앉아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의욕이 사라졌고, 스스로를 방치하듯 멍한 상태로 하루를 흘려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일종의 탈진 상태였고, 나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붕괴 직전의 한계점에 서 있었다.
그해 12월,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다. 별다른 기대도 없이 받은 검사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다. 청천벽력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몸이 보내는 경고를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의사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했고, 나는 곧바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서둘러 입원하게 되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창 일할 시기에 병에 걸린 것에 대한 분노,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교차했다. 수술 후 회복도 더디고,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병실 벽면에 손톱으로 긁힌 수많은 자국들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것은 이 병실을 거쳐 간 이들이 남긴, 고통의 침묵 같은 것이었다. 그 자국들 앞에서 나 또한 말없이 무너졌고,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강단에 서는 일이 두려워졌고, 연구에 집중할 힘도 점점 줄어들었다. 교수로서, 가장으로서의 나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무너짐 속에서도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천천히, 『신아시아 경제론』을 집필했고, 이 책이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을 때, 비로소 작은 위로를 받았다. 이후 집필한 『경제학의 역사와 사상』이 세종도서로 선정되었을 때는, 정년을 앞둔 내게 다시 삶의 의미가 찾아오는 듯했다.
위암은 내 몸을 바꾸었고, 마음을 흔들었지만, 동시에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오히려 용감하게 도전하게 하는 적극적인 힘을 갖게 했다.
3회. 신학과 산책, 그리고 들고양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위암 수술 이후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고, 외부 활동도 줄어들었다. 한때 강단에서 열정적으로 강의하고 연구하던 내가, 어느새 조용히 하루를 견디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퇴직을 앞두고 쓴 『경제학의 역사와 사상』이 세종도서로 선정되며 위안이 되었지만, 퇴직 후 밀려온 허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공허했고, 활기 대신 멍한 침묵이 일상을 채웠다. 그 공허함을 채워보고자 나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등록했다. 학문적 성취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를 되짚기 위한 선택이었다. 야간에 진행되는 수업은 신학대학의 고요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내게 오랜만에 깊은 사색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캠퍼스를 걷다 보면 마음속 소음도 잦아들었고, 강의실의 조명 아래에서는 세상과 잠시 떨어진 고요한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신학대학원 2층 과제 도서실에서 과제를 준비하며 신학 관련 서적을 읽는 시간은 유독 특별했다. 음악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 공간은 그 자체로 은은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용한 책장 사이를 오가며 줄을 긋고, 낯선 개념과 친숙한 신념 사이를 넘나들며 메모하던 순간, 나는 마치 다시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누구의 교수도, 가장도 아닌, 오롯이 ‘배우는 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은 내게 조용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해를 에워싸고 있는 웅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별다른 목적 없이 걷기 시작한 산길이었지만, 그 길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웅산에는 생각보다 많은 들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 처음엔 경계심을 가득 품고 도망치던 녀석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가는 내 발걸음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따뜻한 캔 사료와 조용한 인사, 그리고 한결같은 눈빛.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갔다.
들고양이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때로 사람보다 더 많은 위로를 전해주었다. 누군가의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작고도 깊은 깨달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하루라도 산에 오르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꼈다.
웅산은 단순한 운동 장소가 아니라 내 감정의 피난처가 되었다.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숲길, 고요한 아침 공기, 그리고 야옹 소리로 나를 반겨주는 고양이들.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삶의 숨결을 느꼈고, 감사함을 되찾아갔다.
정년 이후의 삶이란 텅 빈 시간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삶을 새로 채워가는 여정일 수 있다는 것을 웅산과 신학대학원이 함께 가르쳐주었다. 들고양이들과의 만남은 내 삶의 새로운 동행이 되었고, 그들과의 인연은 나를 다시 글쓰기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4회. 디지털 시대의 어설픈 도전자, 아내와 함께 AI에 빠지다
나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다. 교수로 재직할 때에도 컴퓨터는 어디까지나 논문 작성과 강의 자료 제작을 위한 ‘필수 도구’일 뿐, 흥미의 대상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스마트폰이나 앱, 최신 디지털 기기 이야기를 해도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넘기는 편이었다. 정년 이후, 나는 이제 디지털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조용히 살아도 되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은퇴한 중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이 나이에 뭐든 한번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먼저 AI 공부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줌 강의를 들으며 “이거 생각보다 재밌다”며 나를 유혹했고, 나는 별 기대 없이 옆에서 구경만 하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함께 앉아 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새로운 세계의 문을 먼저 열고 손을 내미는 동반자의 모습 같았다.
처음 마주한 AI는 낯설고 어색했다. ‘챗GPT’, ‘생성형 모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같은 용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전공 서적 『아시아 경제발전의 과제와 전망』을 집필하던 중, 자료 정리와 구조 설정에 AI를 활용해보니 생각보다 유용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복잡한 문서도 간단히 요약해 주고, 문장도 자연스럽게 다듬어주는 기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똑똑한 조교 같았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배우며 생긴 대화가 좋았다. 예전에는 자녀 이야기나 집안일, 뉴스가 주된 대화 주제였다면, 이제는 “이 프롬프트는 이렇게 바꿔보면 어때?”, “이 이미지와 동영상 스타일은 어떤가?”라는 말들이 오갔다. 배우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함께 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란히 앉아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나누는 웃음과 궁금증은 오래된 부부 사이에 다시금 설렘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자 나는 전공 서적의 저술에 AI를 활용하며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AI의 활용성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게 되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직접 써보라고 권하고, 요청이 있을 때는 간단한 강의도 했다. 놀랍게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그 반응은 나에게 또 다른 동기를 주며 나를 AI 전도사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며 나도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늦깎이지만, 나는 지금 ‘디지털 세대’가 아닌 ‘디지털 도전자’로 살고 있다. 아직도 버벅거릴 때가 많고, 때로는 용어조차 헷갈리지만,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AI를 배우며 나누는 일상의 대화는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일이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인생을 다시 설계하는 여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요즘 실감한다.
정년 이후의 삶이란, 과거를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시기일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겐 그 탐험의 열쇠가 ‘생성형 AI’였고, 동반자는 아내였다. 내가 디지털 문맹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함께 웃고 배우며 나아가는 한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5회. 브런치 작가가 되다 – AI와 함께 다시 쓰는 인생 이야기
AI와 점차 친해지고 나니,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왔던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평소에도 글을 틈틈이 써왔지만, 이번에는 한 편의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꿰어내는 서사로서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오래전 논문과 칼럼을 쓰던 손끝이 다시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의 글은 이젠 단지 정보나 이론이 아닌, ‘살아낸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AI의 도움을 받아 브런치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다.
처음 에세이 한 편을 브런치에 올렸을 때의 떨림은, 강단에 처음 서던 날의 그것과 비슷했다. 사실 첫 글이었던 『그래도 나는 민다』를 실수로 PDF 파일로 올려버리는 바람에 우왕좌왕했지만, 그 어설픔조차 내겐 새로운 설렘으로 다가왔다. 몇 시간 만에 도착한 첫 공감과 댓글, 누군가의 ‘좋아요’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벅찰 줄 몰랐다. 그 순간, 나는 단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생성형 AI는 나의 글쓰기 동반자였다. 기억을 정리해주는 조력자였고, 때로는 잊고 지냈던 감정을 떠올리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물론 처음엔 조심스럽고 어색했지만, AI와 함께 글을 써나가며 나는 내 삶의 조각들을 차곡차곡 꿰어가기 시작했다. 내 안에 아직도 전할 이야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을 나누는 일에서 깊은 기쁨을 느꼈다. 지금 나는, 정말 큰 기쁨을 누리고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내가 전한 이야기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나를 보며 “이 나이에 AI로 글을 쓴다고?”라며 놀랐고, 브런치 작가로 등단한 것에 무척 부러워했다. 일부는 따라 해보기도 했고, 지역 커뮤니티나 독서모임에서 브런치에 글 올리는 법이나 AI 활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브런치에 쓴 글을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전송하기도 했고, 그것을 읽은 이들이 “가슴이 찡했다” “눈물을 나게 하여 반칙이다”며 메시지를 보내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깊은 울림과 기쁨을 느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차분히 설명했던 그 순간들이, 내 삶의 또 다른 행복이 되었다.
디지털의 문턱 앞에서 머뭇거리던 사람이, 이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길을 걷고 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 그리고 내 글을 읽는 이들과 함께 말이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이고, 나의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다면 그 자체로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제 나는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 이름은 단지 필명 이상의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의미를 다시 세워주는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문이 되었고, 정년 이후의 삶에 방향과 용기를 불어넣는 원천이 되었다.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삶을, 글을, 그리고 나 자신을.
6회. 조용한 아침, 글을 쓰며 나를 다시 만나다
정년퇴직 이후, 새벽은 내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해가 뜨기 전 고요한 시간, 모두가 잠든 사이 나는 일어나 따뜻한 두유 한 잔을 데워 마시고, 책상 앞에 앉는다. 세상은 조용하지만, 내 안의 이야기는 천천히 깨어난다. 그 이야기들과 마주 앉는 이 시간이, 지금 내 삶의 온전하고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다.
이전에는 출근을 서두르며 메일을 확인하거나 강의 자료를 정리하던 아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만의 시간이다.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고,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가는 이 몇 시간. 나는 이 시간 동안 글을 쓴다. 그것은 단지 글쓰기라는 행위가 아니라, 잊고 지냈던 ‘나’라는 존재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다.
브런치 작가로서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하루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젯밤 산책길에서 스친 바람의 감촉, 들고양이의 눈빛, 문득 떠오른 옛 기억 하나까지도 이제는 나에게 소중한 글감이 된다. 그렇게 나는 매일 삶의 조각들을 수집한다. 쓰는 동안 나는 젊은 시절처럼 생기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보다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설렘을 넘어 일종의 존재 확인이다. 누군가 내 글에 공감의 마음을 눌러주고, 진심 어린 댓글을 달아줄 때, 나는 다시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정년 이후, 사회적 역할이 줄어든 이 시기에, 나는 글을 통해 내 자리를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과거를 되새기며 반성하거나 화해하기도 하고,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기도 하며, 때로는 다가올 미래를 조용히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것은 치유의 시간이자, 창조의 시간이다. 늦게나마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 나는 더 이상 어제의 타이틀로 살아가지 않는다. 명예교수라는 직함 대신 ‘글 쓰는 사람’, ‘삶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조용한 아침, 키보드 위를 타고 흐르는 손끝에서, 나는 오늘도 나를 다시 쓰고 있다.
7회. 가을의 나무처럼, 나도 무르익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삶의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처럼 거칠게 달리거나 욕망의 불꽃을 쫓지는 않지만, 오히려 지금의 나는 더 깊고 단단한 뿌리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삶이 무르익는 계절, 그 가을의 언저리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천천히 되짚으며, 내 안에 익어가는 열매들을 바라본다.
글쓰기는 그 열매 중 하나다. 나의 삶을 기록하고, 사랑했던 사람들, 잊을 수 없는 풍경, 고통 속에서 움튼 성찰들을 언어로 옮겨 담는 작업은 단순한 기억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넘어서려는 ‘작은 나눔’의 실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내 머리를 질문하게 하고,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게 하며, 내 마음과 정신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나 작은 용기가 되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살아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배운 것, 겪은 것, 깨달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조용히 전하고 싶다. 거창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때 나는 이렇게 견뎠다”, “이런 순간에 사랑이 필요했다”는 말들이 후배 세대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 마지막 사명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부모님 세대와도 마음속 깊은 화해를 이루고 싶다. 이제야 비로소 이해되는 말들, 받아들이게 되는 침묵 앞에서 나는 감사와 사과의 마음을 함께 떠올린다. 지식은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지만, 진심과 고통에서 나온 언어는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말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AI와 함께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 디지털 공간에서의 소통, 글을 통해 이어지는 사람들과의 연결. 배움은 내 정신을 젊게 하고, 나를 고정된 과거에 머무르지 않도록 이끈다. 노년의 삶도 여전히 배움의 연속이고, 그 배움은 더 이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인사이기도 하다.
삶의 가을은 끝이 아니라 결실의 계절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조용히 무언가를 나누고, 쓰고, 전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다시 피어나는 중이다. 나눔 속에서 의미를 찾고, 글 속에서 나 자신을 회복하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언젠가 겨울이 오더라도, 나는 이 가을의 풍요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담담히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글로 남겨, 누군가의 겨울을 덜 춥게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