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데본]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공간에서 4박 5일

리빙아키텍처-세큘러 리트리트

by 물깊은


런던에서 차로 장장 5시간, 구불구불한 좁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영국 남서쪽 바닷가 마을, 데번(Devon)에 닿는다.


운 좋게도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데번은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즐겨 찾던 역사적인 저택들이 많이 있으며, 영국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다만 차량이 없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에 찾은 곳은 데번에서도 더욱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한참을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을 따라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차도의 폭은 체감상 '1.3차선' 정도로 좁아 초심자에게는 운전이 쉽지 않을 듯하다.)


멀미가 날 정도로 이어지는 길 끝에서


'Secular Retreat'이라 쓰인 작은 나무 팻말 하나가 보인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쳐버릴 만큼 소박하고 조용한 존재감이다. 외부에서는 건물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Secular Retreat(세큘러 리트리트)는 '세속적인'이라는 뜻의 Secular와 '후퇴, 은거' 등의 의미를 가진 Retreat이 합쳐진 단어이니 대략 '세속적인 은거'로 번역할 수 있겠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사색과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입부에 펼쳐진 꽃밭과 소나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페터 춤토르의 건축물. 마치 '공간으로 표현된 시' 같다.


작은 꽃길을 따라가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건축물. 수백 년 된 듯한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언덕 위에 자리 잡아 넓게 펼쳐진 자연 풍경과 어우러진다. 자연을 최대한 담아내면서도 해치지 않고, 또 그 안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으레 쓰이는 표현이 이 만큼 잘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싶다.


세큘러 리트리트 측면 외부에서 보이는 풍경


이번에는 4박5일 동안 이 공간을 온전히 즐겼다. 아침에는 일출을, 한낮에는 따스한 햇살을, 저녁에는 일몰을, 밤이 되면 쏟아질 듯한 별빛을 감상하며. 자세히 보면 별자리도 선명하게 보이고, 운이 좋으면 별똥별도 떨어지는 장면도 마주하게 된다. 일행 중 일부는 매일 저녁마다 별을 보러 나가곤 했다. 과거에는 이런 풍경이 당연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랜 시간 도시에서만 살아와서인지 이 모든 순간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페터 춤토르 (Peter Zumthor, 1943.04.26 - )

세큘러 리트리트는 '빛의 건축가', '건축가들의 건축가' 등 수 많은 애칭으로 불리고 있는 페터 춤토르/피터 줌터가 설계했다. 건축가들과 함께한 여행이었는데, 우리는 영어식 발음으로 편하게 '피터 줌터'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 독일어권 출신이므로 원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려면 '페터 춤토르'가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본 글에서는 페터 춤토르로 표기할 예정이다.


춤토르는 미니멀리즘과 재료의 본질을 강조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스위스 발스 온천(Therme Vals), 브레겐츠 미술관(Kunsthaus Bregenz) 등이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예전에 방문해 보았던 스위스 발스 온천을 포함, 춤토르의 건축 여행 리뷰도 올려볼 생각이다. 특히 발스 온천은 꼭 한 번 경험해 보길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2009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영국왕립건축협회(RIBA) 골드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수많은 수상 이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건축가들의 건축가'로 자리 잡았다는 점일 것이다.



공간 속에서 흐르는 빛과 시간

세큘러 리트리는 콘크리트와 자연석, 커다란 통유리를 활용해 공간 안으로 자연이 그대로 들여온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햇살과 구름, 바람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가 실내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계속해서 변모하는 공간의 깊이와 분위기를 차분히 느끼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벽면의 질감, 건물의 구조적 흐름도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

세큘러 리트리트 거실 안에서 보이는 풍경. 지평선 끝까지 보이는 푸른 자연과 하늘로 눈이 시원해 진다.

내부는 따뜻한 목재와 은은한 조명 덕분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 장작을 떼는 벽난로와, 넓은 전면 창을 마주 보도록 배치된 넓은 아일랜드 주방 덕에,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거실로 모여들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거실과 복도에는 창가를 향한 소파가 놓여 있었고, 함께 간 지인들도 소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의 힘 때문인지, 공간의 힘 때문인지, 누구도 핸드폰을 계속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진으로 이 멋진 풍경을 담아보려 해도 전혀 담기지 않았다. 결국엔 순간순간을 즐기고 눈과 마음에 풍경을 담아내려 애썼다. 어쩌면 춤토르가 바란 공간의 활용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방마다 배치된 화장실 디자인

방은 총 다섯 개, 각각 개별 화장실이 있어 편리했다. 그 중 가장 왼편에 위치한 방에는 욕조까지 마련되어 있다. 욕조에 몸을 담그면 눈 높이에 맞춰 난 작은 창을 통해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춤토르의 건축답게 불필요한 장식은 배제되어 있었고, 단순한 선과 형태, 질감만으로 공간을 완성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부드럽게 스며드는 자연광과, 자연 풍경을 즐길 수 있게 의도적으로 마련해 둔 섬세한 장치들로 감동은 이어졌다.











리빙 아키텍처(Living Architecture)

이곳은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 12.20 - )이 2006년에 설립한 비영리 건축 프로젝트 '리빙 아키텍처'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행의 기술》 등의 저서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철학가이자 작가다. 그는 일반 대중이 현대 건축을 직접 경험하고 숙박할 수 있도록,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독창적인 건축물들을 선보였다.

리빙 아키텍처의 프로젝트에는 페터 춤토르뿐만 아니라, MVRDV, 홉킨스 등 세계적인 건축 사무소가 참여했으며, FAT 건축사무소와 아티스트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도 협업했다. 그중에서도 세큘러 리트리트는 가장 최신에 완성된 프로젝트다.


더 자세한 정보 및 숙소 예약은 리빙 아키텍처 웹사이트를 통해 가능하다. 특히 세큘러 리트리트는 보통 3-4박 이상, 최대 10명까지 머물 수 있다 (이번에 방문할 때는 4박 5일이 기본이었다.) 자동차가 없다면 가장 가까운 기차역인 토트네스(Totnes) 역에서 렌터카 혹은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 기차역에서 약 30-40분 소요된다고 한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함께 흐르는 시간을 느껴보고 싶다면 세큘러 리트리트에 꼭 방문해 보기를 권해본다.



다시금 깨닫는 건축의 힘

돌이켜보니, 스위스와 영국에서 춤토르의 공간을 방문하고 머문 경험이 제법 쌓였다. 같은 곳을 다시 찾아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도, 그의 건축은 화려한 치장이나 장식 없이도 늘 새로운 감각과 감동을 선사했다. 공간 설계에서 재료 선정까지, 주변 자연을 담뿍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도 건축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춤토르는 단순한 건축을 넘어, 공간이 사람의 경험과 감각과 감정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같다. 건축의 힘, 공간의 힘을 새삼 다시 느낀다.


언젠가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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