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의 보석 같은 와이너리, 이기갈
와인을 하나 둘 접하며 내가 좋아했던 특징을 하나씩 기록하다보니... 생각보다 복잡했다. 우선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 보면,
한 가지 맛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혀 앞쪽과 뒤쪽에서 다양한 풍미가 느껴져 흥미롭고 지루하지 않은 것, 복합미(complexity)가 높고 처음 마실 때와 마신 후에도 긴 여운(lasting)이 남는 것, 지나치게 높은 타닌감이나 산도보다는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것, 그리고 화이트 와인조차도 가벼움보다는 묵직한 바디감을 지닌 것이 오래도록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다. 지인들은 이런 내 취향을 두고 '비싼 거 좋아하는 거야'라고 농담하곤 했다.
새로운 맛을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와인 경험의 폭도 넓힐 겸 보통 와인샵에 가서 이런 나의 취향을 일일이 얘기하는데 항상 소개가 너무 길어진다.. 하지만 매번 조금씩 아쉬웠다. 정확한 와인 용어 사용의 부족일 수도 있고, 가용 예산 부족의 탓일 확률도 높을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이런 나의 입맛을 사로잡은 와인이 있다. 바로 론(Rhône) 지역의 이기갈(E.Guigal) 에르미타주(Hermitage)이다. 화이트, 레드 모두 좋았다. 아주 저가 와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하이엔드급도 아니라서 접근하기도 좋다. 프랑스 와인만 놓고 보자면 가성비 대비 복합미를 따졌을 때 론 지역이 가장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사실 마실 땐 아무 생각 없이 즐겼는데, 마시고 나서도 계속 생각나고 몇 번을 재구매하고, 론 지역 다른 와인들도 계속 경험하다 보니 더 리서치를 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본 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할 와인 산지 Hermitage와 Cote-Rotie 관련 한국어 표기를 짚고 넘어가 보려 한다.
- Hermitage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허미티지'로 표기하지만, 실제 프랑스어 발음인 에르-미-타ㅈ(ér·mi·taj)와 와인 애호가들의 일반적 사용을 고려하여 본 글에서는 '에르미타주'로 표기한다.
- Cote-Rotie의 경우(kot ʁoti/Coat-roe-tee)로 코트-로-티로 발음한다. 프랑스어의 'R' 발음을 한국어로 정확히 표기하기 어려워, 본 글에서는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표기하는 '코트 로티'라고 표기하겠다.
론(Rhône) 지역
이 중 내가 좋아했던 에르미타주가 생산되는 론 지역! 프랑스 와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지중해성 기후와 독특한 토양 덕분에 깊이 있는 풍미가 돋보인다. 론 지역은 북부 론과 남부 론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와인 스타일을 선보인다.
북부 론(Northern Rhône)
론 강을 따라 가파른 언덕에 포도밭이 펼쳐져 있으며,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포도는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서 자라 일조량이 풍부하고 배수가 뛰어나 고급 와인 생산에 최적화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주요 품종은 시라(Syrah)로, 강렬한 과일 향과 적당한 탄닌, 그리고 복합적 풍미가 특징이다. 대표적 와인 산지는 에르미타주와 코트 로티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명품 와인을 생산한다.
남부 론(Southern Rhône)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이 길고 덥다. 주요 품종인 그르나슈(Grenache), 시라(Syrah), 무르베드르(Mourvedre)가 블렌딩 되어 부드럽고 과일 향이 풍부한 와인이 만들어진다.
에르미타주는 북부 론에서 생산되는 뛰어난 품질의 와인으로, 강렬한 개성과 숙성 잠재력이 높다. 고대부터 명성을 누려온 이 지역은 13세기 한 은둔자가 속죄를 위해 기도하며 포도밭을 가꾼 데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요 품종인 시라(Syrah)는 강한 구조감과 스파이시한 풍미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레드 에르미타주는 깊고 진한 색상과 검은 과일, 스파이스, 가죽, 흙 내음이 어우러진 풍미를 지니며, 적당한 오크 숙성을 거쳐 묵직하면서도 깊이 있는 맛을 자랑한다. 10년 이상 숙성될수록 우아함과 부드러움이 배가된다. 30년 이상 숙성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화이트 와인은 마르산(Marsanne)과 루산(Roussanne) 품종으로 만들어지며, 복합적인 향이 특징이다. (개인적으로 에르미타주 화이트도 정말 좋았다!!)
이 에르미타주를 가장 맛있게 만드는 와이너리 중 하나가 내가 좋아했던 이기갈이다.
"구운 언덕"이라는 뜻의 코트 로티는 로마 시대 24세기 전에 조성된 급경사의 테라스에서 재배된 시라 품종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은 코트 브륀(Côte Brune)과 코트 블론드(Côte Blonde)로 나뉘는데, 전자는 강렬하고 묵직한 스타일, 후자는 시라에 소량의 비오니에(Viognier)를 블렌디해 보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맛을 자랑한다. 코트 브륀은 거의 대부분 시라(Syrah) 품종으로 심어져 있으며 시라에 소량의 비오니에(Viognier)를 블렌딩 했다.
이 명칭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의 영주는 두 딸을 두었는데, 한 명은 밤처럼 검은 머리를, 다른 한 명은 밀밭처럼 금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결혼할 때, 그는 두 딸에게 각각 최고의 경사지 두 곳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코트 브룬과 코트 블론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이기갈 공식 홈페이지)
론 밸리 최고의 화이트 와인 산지 중 하나로, 비오니에(Viognier) 품종만을 사용한다. 잘 익은 살구와 복숭아 향이 특징이며, 부드러운 질감과 풍부한 아로마로 유명하다. 이 희귀한 품종은 기원전 초기, 그리스인들에 의해 들여온 것으로, 화강암 토양과 만나 자연스럽고도 복합적인 특성을 지닌 독창적인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황금빛을 띠며, 은은한 살구와 흰 복숭아 향이 어우러진 섬세한 풍미가 특징이다.
남부 론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그르나슈(Grenache)를 중심으로 한 13가지 포도 품종을 혼합되어 다채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어진다. 석회질의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이 토양은 미스트랄(Mistral) 바람의 영향을 받으며, 프로방스(Provence) 지역의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독특한 남부의 풍미를 담아냅니다. 복합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동시에 스파이시하면서도 강렬한 탄닌을 가지고 있으며, 풍부하고 강한 개성을 자랑한다.
그 외 생 조제프(Saint-Joseph), 크로즈-에르미타주(Crozes-Hermitage) 역시 북부 론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 중 하나다. 특히 크로즈 에르미타주는 에르미타주 지역을 감싸고 있는 위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친근한 스타일의 시라 와인을 만날 수 있다. 과일 풍미가 강조된 와인이 많다.
이기갈(E. Guigal)은 론 밸리(Rhône Valley)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중 하나로, 1946년 에티엔 기갈(Etienne Guigal)이 설립했다. 전통적인 와인 양조 기술과 현대적인 혁신을 결합하여, 론 지역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은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한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와인 명가로 자리 잡은 이곳은 단순한 와인 생산지를 넘어, 3대에 걸친 장인 정신과 혁신이 담긴 곳이다. 2003년부터 와이너리 내부에 자체적 오크통 제작소(Cooperage)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에서도 아주 드문 방식이다. 와인 숙성 과정을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반증이겠다.
이기갈은 위에서 언급된 코트로티(Côte-Rôtie), 에르미타주(Hermitage), 생-조제프(Saint-Joseph) 등 론 밸리의 명품 포도밭을 직접 소유하고 관리한다. 북부뿐 아니라 남부 론의 명불허전 샤또네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 코트 뒤 론(Côtes du Rhône)
도 생산하고 있다.
이기갈의 에르미타주 와인은 강렬한 과일 향과 오크 숙성에서 오는 복합적인 향이 특징이며, 숙성 잠재력이 뛰어나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30년 이상 숙성 가능하다.
향후 다시 리뷰하고 싶은 이기갈의 코트 로티 역시 흥미롭다.
코트 로티가 에르미타주보다 조금 더 섬세한 편이며, 베이컨, 그린 올리브, 라즈베리 등의 아로마를 지닌 부드럽고 과일 향이 풍부한 와인으로 20년 이상 숙성될 수 있다. 코트로티의 대표적 싱글 빈야드인 '라라(Lala) 3부작' 라 물린(La Mouline), 라튀르크(La Turque), 라 랑돈(La Landonne)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전설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세계적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라라라 시리즈 2003, 2005, 2009년 빈티지 모두 100점 만점을 주어 화제를 낳았다. '라 물린'이 실크처럼 매끄럽다면 '라 랑돈'은 묵직하고 힘이 느껴진다. '라 튀르크'는 위 두 가지 와인의 서로 다른 특징이 어우러져 섬세하면서도 뒷심이 느껴지는 맛을 낸다. (참고: 신세계 L&B)
혹시 프랑스 와인 하면 보르도와 브루고뉴만 떠올리신다면 론 지역 와인도 꼭 추천하고 싶다. 특히 와인샵에서 이기갈 브랜드를 발견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한 병 가져와 보시길! 만족스러운 한 잔을 즐기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주요 출처: 기갈 공식 홈페이지(guigal.com), Wine Dumm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