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개팅
우리의 첫 만남은 소개팅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났다고 하면 다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다시 되묻는다.
근데.. 주리 씨는 항승 씨가 그런..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
그.... 알고 소개팅한 거야?
백이면 백, 다른 반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질문에 나는 또다시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그냥 미소만 보이고 말을 끝내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마음씨 착한 여자’라는 원치 않는 타이틀을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긴 바지를 입고 있을 땐, 사람들은 항승 씨가 의족을 사용한다는 걸 거의 눈치 채지 못한다. 물론 오른쪽 팔은 바로 알 수 있지만 말이다. 자, 그럼 12년 전의 그 소개팅 전 날로 돌아가 볼까?
대학 동기인 H양이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었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소개팅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심하게 긴장됐지만.. 언제나 사랑으로 먹고사는 불나방 권주리였기에 조금 고민하다가 바로 오케이를 했다! 하지만 나와 소개팅을 할 남자가 장애가 있다고 했다. 자기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약간의 약시(시각장애)가 있는 것 같다고.. 정말 보이지 않는 전맹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각장애가 있는 것 같다는 애매모호한 말. 그때까지 참으로 자유로운 연애주의자였던 난, 그 정도의 시각장애는 연애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수교육과를 졸업하고 장애 아이들을 만나는 연극강사였고, 남동생도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물론 보통의 20대 여성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과 일상이 분리되듯이, 나라고 해서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소개팅 전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 뭐, 사랑을 눈으로 하나?...'
그런데 다음날 나의 첫 소개팅을 위해 피부에 이것저것을 덮고 누워있던 중. 주선자에게 전화가 왔다. 긴 통화를 마친 후, 멍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기가 착각했었다며, 내일 나올 사람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팔이 하나 없는 지체장애인이라고 했다.
'.........................'
장애인 동성친구, 이성친구는 있었지만 장애인 남자 친구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20살 중반의 나.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만남을 전제로 하는 소개팅을 한다는 것은 사실 상상도 못 했었다. ‘난 못해’가 아니라 그냥 전혀 상상을 해보지 않았던 부분인 거다. 참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랬다. 장애 아이들에게는 너도 할 수 있다며,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해서 살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주던 내가 막상 지체장애인을 데이트 상대로 만나려고 하니 가슴이 점점 더 먹먹해졌다. 솔직히 그 소개팅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과 연애, 결혼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도 않은 그냥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장애인과 결혼하는 비장애인을 바라보며 '와~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나 보다. 사랑의 위대함이다! 멋지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고, 그 옆의 장애인을 바라보며 '와..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비장애인과 결혼하니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할까.. 파이팅!'이라는 생각만 했었다. 마치 앞집 불구경하듯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특수교육과, 특수교사, 장애인 가족..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소개팅을 위해 대전에서 일부러 서울로 올라온 사람을 어찌 다시 내려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알고 보니, 소개팅을 위해 일부러 왔다기보다는 서울에 올라온 김에 소개팅까지 했다고 하더라. 뭐야, 난 겉절이였니?) 사람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난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첫 소개팅을 위해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름대로 꽃단장을 하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언니의 하얀 원피스를 훔쳐 입고, 작고 예뻤던 목걸이와 귀걸이를 훔쳐 걸고.. 한참 좋아하던 당고머리를 하고 언니의 구두를 또각거리며 강남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남자. 10분 전인데 연락이 없다.
5분 전
정각
10분 뒤
20분 뒤
...
연락이 없다. 겨우겨우 연락이 닿아서 하는 말은 이랬다.
차를 가지고 나왔는데,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강남역 주변을 돌고 있어요..
토요일 오후에 강남역에 차를 가지고 나오다니. 그럴 예정이었다면 어디에 주차할지 미리 알아놨어야지!! 적어도 소개팅인데 말이야. 그렇게 그와 남자 쪽 주선자는 40분을 늦었고, 그는 말끔한 티셔츠와 신경 쓴 티가 많이 나는 조끼를 걸쳐 입고 애매한 웃음을 보이며 걸어왔다. 뭐, 귀여웠다. 엄청나게 미남인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듬직했고, 귀여웠고, 순박해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 팔이 없었다. 사실 직접 보니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그의 팔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분명 그도 느꼈겠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그는 어디서 식사를 하면 좋을지 나에게 물었다.
“....?”
서울에 올라와보니 건물이 너무 높다고, 이렇게 큰 건물들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며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던 그의 모습이 사실 참 귀여웠다. 식사할 곳을 생각해오지 않은 비매너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의 순박함에 웃으면서 넘어가기로 크게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나의 안내에 따라 일본식 카레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주선자 2명과 함께 총 4명이서 어색한 식사를 하면서 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맵지도 않은 카레를 먹으면서 땀을 어찌나 뻘뻘 흘리던지. 카레집에 가자고 한 내가 미안해질 참이었다. 지각 때문에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탓일까. 항승 씨가 나중에 와서 말하기를.. 그때 나의 표정이 정말 무서웠다고 한다. 세상에서 시간 약속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난데. 그는 엄청 늦었으니. 그럴 법하지 않은가?
식사 후에도 내가 선택한 커피숖으로 향했고, 한적하고 분위기 좋은 엄청 비싼 카페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5살 때의 교통사고를 언급했고, 갑자기 오른쪽 바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있어야 할 다리가 없었다. 아주 단단해 보이는 철봉 같은 종아리만 있었다.
전날 저녁, 팔 절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다리는 몰랐었다. 그때 아주 잠깐 우리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내가 느끼기에는 아주 잠깐일 것이고, 항승 씨가 느끼기에는 아주 아주 아주 긴 시간이었겠지. 정적을 깨기 위해 나는 말을 마무리하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화장실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적어도 10분은 넘었을 것이다. 너무 당황해서 뭘 어찌해야 하나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야 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 주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리도 하나 없대. 너 그거 알았어?” 주선자의 대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 화장실 거울에 비쳐 보이던 당황한 내 얼굴뿐이다. 통화를 마치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를 추려봤다.
1. 침착하게 다시 나가서 소개팅을 잘 마무리하고
좋은 인연이었다며 끝을 낸다.
2. 다리 하나 없으면 어때. 어차피 팔도 없는데.
그냥 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3. 화장실의 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
3번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그곳은 높은 2층이라서 뛰어내렸다가는 내 다리도 하나 없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어쨌든 이 소개팅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니, 최대한 예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1번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꽤 흐른 뒤 나는 다시 항승의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대화를 시작하니, 그의 장애로 인한 쇼크는 사실 금세 사라져 버렸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의 생각, 가치관, 목표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모험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며, 배낭 하나 달랑 들고 유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유로움이 나와 비슷했다. 게다가 갈등 상황에서 일단 성질부터 부리지 않고,. 차분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의 소통방식이 나와는 너무 달라서 더 좋았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쯤, 난 이미 머릿속에서 그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대전과 서울. 어떻게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하지?’
커피숖에서 나와 나를 지하철로 데려다주던 항승 씨의 발걸음이 아주 빨랐다. 마치 나를 빨리 보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강남역 7번 출구 앞까지 엄청 빠른 발걸음으로 데려다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음에 뵐 수 있으면 또 봐요
이게 뭐지? 이게 뭐 하자는 거지? 내 전화번호 묻지 않는 거야? 나랑 연락하고 싶지 않아? 너 아까까지는 나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왜 이래? 내가 별로야? 설마 나 지금 까이는 거야? 너 지금 나 뻥 차 버리는 거니?
그는 나의 등을 떠밀었고, 나는 그대로 사람들의 홍수에 휩싸여 강남역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첫 소개팅에서 이렇게 뻥 차인 난 멘붕에 빠졌다. 술도 잘 못 하면서 친구들과 모여 소주 맥주를 들이부었다. 술김에 주선자에게 전화해서 한참 동안 고해성사를 빙자한 진상을 부렸다. 내가 그렇게 별로인지, 진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간 건지, 원래 소개팅이 이런 건지, 자기가 늦어놓고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등등.. 결국 이 진상 술주정은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까지 왔다.
항승 씨에게 다음날 전화가 온 것이다. 너무 미안했다고, 자기는 소개팅을 처음 해봐서 예의를 잘 몰랐다며, 주선자에게 물어서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했다. 자기가 처음부터 너무 늦어서 주리 씨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얼른 자리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밖에는 없었고 그래서 얼른 나를 보냈다.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했다 등등.. 주리 씨는 완전 서울 아가씨인데 자기는 너무 시골총각 같아서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등.. 긴 전화통화 끝에 오해가 있었던 걸로 마무리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끝냈다. 그렇게 연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소개팅은 친구도 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다. 그냥 나는 매력 없는 그런저런 여자이자 신경질적인 서울깍쟁이로, 항승 씨는 소개팅에 40분 늦은 남자이자 나를 뻥 차 버린 남자로..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그냥 흘러갔다. 간간히 문자로 연락을 하거나, 일 년에 한 번 정도 얼굴 본 적은 있지만 연애감정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별로 친하지 않은, 그냥 가끔 연락하는 이성친구로 관계를 마무리하는가 싶었는데 우리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때부터 진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