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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주리 Aug 16. 2020

엄마.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나는 항승을 좋아해요

항승과 연인이 된 이후로 우리의 만남과 관련해서 가장 걱정된 부분은 바로 ‘어머니께 이 사실을 어찌 전해야 하나’ 그 부분이었다. 장애인 남자 친구를 만나는 딸. 한 팔만 없는 줄 알았는데 다리 한쪽도 없단다. 일반적인 가정의 부모님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예상해보았다.

" 뭐? 네가 미쳤구나? 얘, 정신 차려! 당장 헤어져! 절대 안 돼!! "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해보니.. 무언가 달랐다. 조금 다른 느낌의 대화가 오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 집에는 이미 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있다. 유난히 많이 울던 아기. 이미 딸 둘을 키워본 적이 있는 어머니였지만 막내아들을 키우는 것이 유독 힘들었다고 하셨다. 우유를 배부르게 줘도, 안아줘도, 놀아줘도, 목욕을 시켜줘도, 밖에 데리고 나가도.. 막내아들의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냥 좀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아이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2년 정도가 지났다. 동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유독 혼자서 계속 한 곳만 쳐다보며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던 어느 날, 동생은 "자폐"라는 장애 명을 진단받았다. 동생은 그렇게 30살이 된 지금까지 중증 발달장애/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 후 우리 가족 최고의 목표는 동생의 신변자립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동생이 장애 진단을 받은 후, 약 20년간 온갖 교육과 치료를 섭렵하시며 그를 위해 달려오셨다. 하지만 동생의 장애는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하거나, 새롭게 태어난다거나, 갑자기 기능이 막 좋아진다거나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틀렸던 것이다.


항승과 친구로 지내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그의 장애를 알고 계셨지만, 그 사람이 설마 나의 남자 친구가 될 줄은 예상 못 하셨을 거다. 그와 만나기로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난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이미 나와 항승 씨의 분위기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다.




" 어머니. 저 항승이랑 진지하게 만나기로 했어요. 이제 항승이가 제 남자 친구예요. "

"..........................."

" 엄마,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항승이가 너무 잘해줘요. 진짜 자상해요. 요즘 너무 행복해요 "

"........................................"

" 엄마.. 솔직히 말하고 싶었어요. 더 이상 엄마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요. 엄마에게도 당당하고 싶어요"

" 주리야... "

" 네 "

" 난 네가 왜 굳이 항승이를 만나는지.. 아니, 모르겠다. 엄마 마음이 뭔지 모르겠어. 물론 항승이는 좋은 사람이겠지만.. 네가 동생 때문에도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굳이 왜 힘든 길을 또 선택하려고 하니.. 좀 더 편하게 살 수도 있잖아. 굳이 장애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니? 아니, 모르겠다. 엄마는 잘 모르겠어. 그냥 난 우리 딸이 이제라도 좀 더 마음 편히, 몸 편히 살았으면 좋겠어. 세상 어느 엄마라도 똑같은 마음 일거야... 늘 참기만 하고 살았던 네가 왜 또 참으려고 하니..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주리야.. “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꾹꾹 눌러가며 참아내시는 울음소리가 전해졌다. 난 그때까지 살면서 어머니께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도영이가 사당동에서 실종됐을 때. 비가 오는 가을밤. 얇은 옷 하나를 입고 사라졌는데 밤새 찾을 수 없던 그 날. 새벽에 차에 앉으셔서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자신이 제대로 아들을 보고 있지 못해서, 도망갔을 때 바로 찾지 못했다고, 그렇게 자책하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시던 그 날. 딱 하루였다.

그리고 나의 전화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못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아도 우리 엄마에게만은 착하고 착한 딸이고 싶었는데.. 그거 하나 해드릴 수 없는 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내가 엄마의 딸이라서 너무 죄송스러웠다.


어색하게 전화를 끊고,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집으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눈물이 나의 가슴에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고, 세상에서 제일 못된 대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를 낳아주시고, 사랑과 헌신으로 길러주신 어머니께 정말 못할 짓을 한 딸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말, 그를 만나 조용히 털어놓았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조곤조곤 아무렇지 않은 듯이 털어놓다가 터져 나오는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 정말 너무너무 미안해. 근데 어쩌지? 난 너 때문에 엄마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아. 난 엄마가 너무 소중해 "


그와 만난 지 한 달이 겨우 지날 때쯤이라 난 아마 그 보다 엄마를 향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항승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너무나도 큰 부분인 ‘가족’을 항승과 연애한다는 이유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아마 그가 나를 위로해주며, 우리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 보자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으면서, 나를 놓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니. ‘엄마의 눈물’이라는 공격으로 항승에게 또 상처를 주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생각을 정리 중이라는 표현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주리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절대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만약 내가 뭔가 잘못했다면, 아주 용서 못할 짓을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러나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 이 장애는 나의 잘못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바뀌지도 않아. 그냥 나 자신이야. 이게 나야. 그래서 더 물러날 수 없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부모님께도 인정받고 싶어. 차근차근. 아주 천천히. 우리 같이 노력하자. "


처음으로 고백을 받던 그 날처럼 그는 담담히, 그리고 아주 침착하게 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그의 깊은 진심에 공감했다. 그 전화통화 이후로 어머니와 나는 한동안 조금은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그 날의 통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후로 항승은 꽤 오랫동안 나의 부모님께 정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일단, 겨울이 되면 주말마다 강원도 스키장으로 향했던 우리는 다행인지 스키장 바로 앞에 시골집 터를 잡으신 부모님 덕분에 식과 주를 해결하며 ‘비비적비비적 작전’을 개시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장작을 패서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시골집이라서 늘 장작이 부족했는데, 그는 틈나는 대로 장작을 패서 쌓아두었고 3~4시간마다 체크해야 하는 보일러를 늘 살폈다. 이게 말로는 쉬운 일 같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작을 패고, 장작을 채워 넣고, 20분간 불을 피우고, 숨구멍을 조절해야 한다. 그 후에는 다 타버린 재를 꺼내고, 처리한다. 화목보일러는 시골집의 생명이라며 절대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던 아버지께서.. 1년이 지나고, 2년 차 겨울이 오자 항승이에게 " 불 좀 봤나? "라는 아침인사를 건네셨다.

세상에. 아버지께서 아침 첫 보일러 살핌권을 그에게 넘기신 것이다. 그는 또 사람 좋은 미소로 " 네, 아버님! " 대답하며 보일러로 달려간다.

여전히 마음 한쪽이 무거우셨던 어머니께는 그의 보드 실력을 활용한 작전을 펼쳤다. 스키를 타시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며 그가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난 내 앞길 찾느라 무서워서 영상 촬영은 못하는데.. 그가 보드를 타고 휙휙~ 이리저리~ 푸왁푸왁~ 눈길을 가르며 어머니 옆에 다가오는 사람들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고, 멋진 영상을 찍어드렸다. 인라인, 자전거, 등산, 스케이트, 스키, 수영을 즐겨하시는 스포츠우먼 어머니께서 그의 열정적인 스포츠 정신을 인정하기 시작하셨다. 의족으로 보드를 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시기에 그의 끝나지 않는 열정에 감탄하셨다. 보드뿐만 아니라 자전거, 배드민턴, 수영에 도전하는 그의 모습이 어머니의 스포츠우먼 정신과 짠 하고 만나면서 그때부터 항승 씨를 향한 어머니의 호감도가 상승했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한결같은 우직함과 나를 향한 그의 따스한 마음에도 물론 감동하셨다. 둘째 딸내미가 겉으로는 사근사근해도 속은 자기 멋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엄마"이기에 그런 나를 묵묵히 지켜봐 주고 사랑해주는 그의 마음을 더 느끼셨을 거다.


이 시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아버지, 어머니께서 항승 씨를 딸내미의 남자 친구로,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만나는 애인으로 받아들이신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항승 씨, 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그에게 바란 것은 장애를 극복한 대단한 인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그의 장애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셨다. 처음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던 그때, 나는 그의 장애를 최소로 숨기고 그가 비장애인들과 크게 다름없이 살 수 있다는 점을 어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부모님께서는 장애인 남자 친구가 아니라 항승 씨 그 자체를 인정해주시고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셨다. 결국 세상도 그러한 게 아닐까. 장애가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인생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아마 이래이래 저래저래 해서 결국은 이렇게 될 것 같아. 그래서 난 아예 안 할래..'라고 만약 그와의 연애를 그 전화통화 이후에 그만뒀다면 난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항승이 없는 삶이 이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벌써 그렇게 그에게 물들었다. 그도 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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