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과 같다면 내 손을 잡아줘
제주도 여행 후 항승씨와 좀 더 자주 연락하게 됐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동시에 무언가 애매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종일 공연 연습을 하면서도, 혹시 그의 문자가 오지는 않을까 하고 핸드폰으로 자꾸 신경이 쏠렸다. 그렇게 애매모호하고 몰캉몰캉한 2주가 지나고, 그에게 연락이 왔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문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포천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났다. 문자메시지처럼 무언가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차를 깨끗하게 세차하고, 아주 단정한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만지고, 내가 좋아하는 안경(당연히 알 없는)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났다.
'.. 아, 오늘인가?..'
분명 느끼고 있었지만 식당에서 애써 모른 척했다. 왜 그랬을까? 나의 밀당은 왜 혼자 계속됐던 걸까? 지금이었다면 덥석 그의 손을 먼저 잡았을 텐데... 그때는 그저 앉아서 새침한 미소를 지은 채로 음식만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그가 꼭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난 모르는 척 따라나섰고, 그의 차는 포천에 있는 한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허브와 꽃, 그리고 아주 다양한 색깔의 조명들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심장은 두근두근 쿵쿵. 내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 같아서 꾹꾹 참느라 말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옆에서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함께 걷던 항승씨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그도 유난히 말이 없다. 하지만 그의 등에는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배낭이 하나 들려있다. 그냥 여기 이것저것 들어서 가지고 나왔다고 말하는 그.
'... 아.. 혹시?.. '
공원 깊숙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그는 자신의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하며 어정쩡한 브이 포즈를 잡았다. 멋지게 사진을 찍고 나니 그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주리야.
세상에. 내 이름이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걸 들으니.. 너무 놀라웠다. 글자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지는 나의 이름이 이렇게 두근거렸었나? 항승씨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담담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배낭에서 장미 꽃다발을 꺼내 나의 손에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난 너를 좀 더 알고 싶어.
너와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
너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어
세상에. 이렇게 돌직구를 날리다니. 미사여구를 다 빼버리고, 이렇게 나에게 직접 말하다니. 나 혼자 열심히 했던 밀당을 싹 잊게 할 만큼 강력한 고백을 나에게 던졌다. 그때부터 난 생각의 회로가 막혀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 이건 내가 어찌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논리적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였는데, 이건 논리로는 정리가 안 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고, 그 마음을 전하고 공유한다는 건 논리가 통하지 않는, 너무나도 비논리적인 과정이다. 감정이라는 놈이 참 그랬다. 그 뒤로 약 1분간 정적이 흘렀고,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그 공원에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만 더 크게 울렸다. 항승씨는 나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챘고, 그 뒤로 나의 감정들을 토닥여주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주리야. 내가 이렇게 너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네가 좋았지만 쉽게 말할 수 없었어. 내가 생각했을 때 넌 너무 대단한 여자고, 난 너무 부족한 남자거든. 물론 난 장애도 있고. 직업도 안정적이지 않고. 돈도 별로 없고. 너에 비해 부족한 것들만 계속 생각났어. 내가 너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만 계속 떠올랐지. 그러면서 나의 감정을 숨겼던 것 같아.
하지만 여행을 함께 하면서,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안 되는 이유들을 하나둘씩 버릴 수 있게 됐어. 지금도 난 여전히 부족해.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어. 그렇지만 너는 나의 그런 점들을 버릴 수 있게 해 줬어.
진심으로. 너와 함께 있으면 난 계속 힘이 생겨.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세상에. 진심이 정말 강하게 느껴져서 더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냥 심장이 턱- 하고 막히는 그런 느낌. 감정을 꾸며가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니 어찌해야 할지 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이 고백은 시작에 불과했다.
항승씨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한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동시에 나는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질문에 어울리지 않는 답인데, 왜 계속 그런 말들만 했던 걸까? 난 항승씨의 진심 어린 고백을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항승씨의 그 진심을 받아줄 수 있는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전후 사정을 고려했을 때 분명 우리는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었고 곧 누군가 먼저 고백을 할 타이밍이었고, 결론이 나올 그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나는 왜 그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밀어내려고 했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그와의 연애를 꿈꾸고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나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온통 그를 향한 화살이었다.
" 사실 난 엄청 이기적이야. 네가 알게 되면 너도 나를 싫어할 거야.
난 너와 친구로 지내면서 사실 착한 척한 거야 "
일단 이렇게 자기 비하를 하며 화살을 들었다. 하지만 항승씨는 나의 말에 정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논리적인
반박을 했다. 그래서 질 수 없는 난, 계속해서 나의 이상한 단점들을 덧붙였다.
" 난 뚱뚱해. 예쁘지 않아. 난 남자 친구보다 내 일이 더 소중해. 난 이런 여자야. 난 너에게 도시락을 싸주고 마중 나가는 현모양처 스타일이 아니야. 너와의 약속과 일이 겹친다면 난 생각도 안 해보고 당연히 일을 하러 갈 거야. 난 요리도 못해. 난 사실 청소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 밖에서만 깔끔한 척 해. 난 친구도 별로 없어. 난 엄청 이기적이거든. 난 내가 중심이야. 내 논리로 세상을 봐. 겉에서는 웃지만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아. 이렇게 이중적이야 "
나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들에도 그는 정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대답해줬다.
너의 건강함이 좋아
너의 그런 면을 난 원래 좋아했어
요리는 내가 할게
청소는 같이 하자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
너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면 되잖아
포천에서 출발해 돌곶이로 오는 그 한 시간. 그는 나의 이기적인 이야기들을 끝까지 담담하게 들어주었고,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적절한 해결책들을 제시해주었다. 이미 머릿속은 패닉 상태라서 항승씨의 말들이 외계어로 들렸다. 심지어 다음과 같이 진짜 이상한 이유도 있었다..
" 난 겨울에는 주말마다 보드를 타러 스키장에 가. 시간 있을 때마다 강원도로 향해. 우리가 만약 사귀게 된다면 주말에만 만나야 할 텐데 넌 보드를 즐기지 않잖아. 이런 날 이해해줄 수 있어? "
진짜 이상한 이유인데,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진심이다. 그는 날 빤히 쳐다보며 웃었고, 이렇게 답했다.
"나도 같이 탈께. 한 번 배워볼게. 네가 가르쳐줘 "
의족을 사용하는 사람이 스노보드를 즐긴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나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우리의 시끄러운 사랑전쟁은 끝났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들어왔고, 그 날부터 3일간 항승씨의 말들을 계속 곱씹었다. 처음에는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가 남편과 헤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글로 정리하던 장면처럼 나도 정말 A4용지를 앞에 놓고 논리적으로 이유들을 정리했다. 그와 사귀게 된다면 우린 보통 커플처럼 거리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어머니와 아버지께 과연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까? 근데 아무리 정리해 봐도 이건 논리적인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도박판에서 걸고 또 걸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도 아니다. 논리로 살아가던 나에게 감정으로 선택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때의 멘붕이란. 정말 하늘이 빙빙 돌고, 모든 사물들이 항승씨의 고백으로 보이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다 나에게 바보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비실거리던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야! 어차피 네 마음은 다 정해져 있잖아? 마음의 소리를 들어!! 쫌!! 지금 수능 공부하니?"
맞다. 그랬다. 난 항승 씨와의 관계를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따져보려고 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30이라면 그도 나에게 30만큼, 아니 40만큼 줄 수 있는지를 조건과 상황으로 계산했었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지금 0이면 어떤가. 그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0이라면 또 어떤가. 내가 그의 것으로 100을 채워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 연애의 목표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3일이 지났고, 그가 다시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성북동의 수연산방이라는 전통찻집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묵직하게 그가 다시 물었다.
" 이제 대답해 줄 수 있니? "
" 으악. 아니... "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곤 다시 3일 전의 그때처럼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지에 대해 다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마음은 분명 항승씨를 향하고 있는데 행동은 산으로 향하고 있다. 3일간 숙성된 나의 논리를 들은 그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 아니, 그런 거 말고. 난 네가 어떤 이유를 말해도 상관없어. 함께 마주하면 되니까. 내가 궁금한 질문에 대해 답해줘. "
으악. 그는 더 이상 2년간 친구로 알아왔던 항승씨가 아니었다. 내 앞에 앉아있던 그는 정말 단단한 남자였다. 커다란 그 앞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졌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갔으며, 테이블 위의 찻잔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도 내 맘을 모르겠다. 그는 3일 전처럼, 나의 당황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주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헉. 세상에. ‘나는 나의 마음을 아직 전할 준비가....’ 이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찻집을 나와 북악 스카이웨이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운데에 있는 팔각정 2층으로 올라가 그가 말했다.
주리야. 나의 마음과 같다면 내 손을 잡아줘.
하. 세상에. 나는 떨려 죽겠는데 그는 어쩜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그가 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난 그 팔각정을 정확히 17바퀴 돌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을 계속 지나쳤지만 손을 잡을 용기가 없었다. 그 손을 잡고 나면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때도 난 여전히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나 보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난 도저히 지금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날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내가 평소에 자주 가던 한강으로 향했다. 이 곳이라면 좀 더 편히 생각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가 다시금 단호히 말했다. 그 한강 다리 밑에서 나는 또다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또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머리는 이미 터진 후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위아래 앞뒤 전후 사정 다 버리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자고. 내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의 손을 잡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난 방향을 바꿔 그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두꺼웠고, 단단했고, 거칠었다. 그의 왼손은 오른손이 해야 할 일들까지 혼자서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더 무거웠다. 그리고 그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