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어 어린 나를 도닥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한껏 기대를 안고 집에 들어갔다.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아무도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기대를 안고 집에 들어갔다.
혹시 엄마가 웃으며 맞아주지는 않을까? 언니 오빠가 있지는 않을까?
아빠가 약국에서 잠깐 들여다 봐주지 않을까?
한 여름에도 한 겨울의 차가움을 뿜어내는 마룻바닥의 냉기. 넓은 거실에 맴도는 차가운 공기.
내 옷차림과 거실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보면 분명 따스한 날인데 이 곳은 살을 에이는 바람이 부는 허허벌판이었다.
허공에 대고 인사도 해본다. '다녀왔습니다. ' 이내 코끝이 찡해지고, 눈엔 눈물이 났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는 재수생, 큰언니는 고2, 작은언니는 중3이었으니까. 머리가 좋아서 학교와 집에서 모든 기대를 받고 있었던 오빠가 재수를 하게 되면서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큰언니는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고 작은언니는 미대를 나오셨던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기싸움을 하던 시기였다.
엄마는 집에서도 뛰어다니셨다.
부엌과 거실을 지나 안방과 이어진 약국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식 왔다 갔다 하셨다. 거실화가 한 달도 안 가서 닳아서 구멍이 났다. 매일 아침 한 명에 두 개씩 6개의 도시락을 싸고 매 끼니 새로운 국과 반찬을 요구하셨던 아빠의 식사 준비를 미리 해놔야 했다.
언니 오빠의 건강을 위해서 직접 한약을 달이시기도 했고, 식구들이 먹고 싶다는 음식은 거의다 집에서 만들어 주셨다. 마장동에서 신선한 고기와 선지, 내장을 사 오셨고, 청량리 시장에 가서 야채와 과일을 대량으로 사 오셨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왼쪽 팔이 불편하셨던 아빠는 한 손으로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50평대 단독주택의 관리를 다 하셔야 했다. 전구를 가는 일부터 정원의 나무를 다듬고 보일러를 살피는 일까지. 게다가 약국에서 짐을 옮기거나 한약재를 살펴야 하는 일 등 약국의 일도 아빠를 도와드려야 했다. 아빠가 한약을 잘 지어서 손님이 많을수록 엄마의 일은 더 많아졌다.
늘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나는 투정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화장실도 못 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안일을 돌보고 잠깐의 쉬는 시간도 없다는 것을 보는데, 나 좀 봐달라고 할 수 없었다.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그마저의 사랑도 관심도 받지 못할까 봐.
그저 괜찮다.... 나는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하교할 때 비가 왔다. 교실 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밀려 올라오는 인파를 보았다. 아이들에게 우산을 전해주러 온 엄마들, 아빠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식구들이 갖고 온 우산을 쓰고 하나 둘 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언제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된 걸까. 비가 언제 그칠지는 나에게 아무 상관없었다. 언제건 이 비를 맞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내게 가족이 있기는 한 걸까?
가족의 의미는 뭐지?
엄마는 언니 오빠만 자식인가, 나는 신경도 안 쓰고.
나를 걱정하기는 하나?
언니 오빠랑 나이 차이도 10살이나 넘게 나는데, 정말 내가 친 딸이 맞는 걸까?
엄마는 집에 있으면서도 우산 한 번을 안 가져다주는 거지?
내가 없어지면 누가 울어주기라도 할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집에 왔던 날. 옷은 젖었지만 내 마음은 완전히 말라버렸다.
다른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엄마가 우산도 갖다 주고 간식도 챙겨주던데......
단 한 번이라도 집에서 따스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유지하고 있던 평화가 깨질까 봐.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가 너무 힘들고 지쳐 보이는데, 나까지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봐.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마음이 아파서 그러는 건데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알약이랑 물약이 소용 있나요
언제나 혼자이고 외로운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이불속에서 차가운 손을 움켜쥐고 가만히 불렀던 노래.
신나는 노래였지만, 내게는 내 마음을 읽어주는 눈물 나는 노래였다.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처가 가득한 내가 과연 엄마가 될 자격이나 있나 싶기도 했고, 결혼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내가 갖지 못했던 따스함을 주고 싶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집에 들어왔을 때 밝은 미소와 포옹, 맛있는 냄새와 따뜻한 간식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갖고 있었다. 나의 굳은 마음을 녹여주는 사람을 만났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내가 엄마가 되었다. 한 명도 아니고 세명, 19개월 터울의 삼 남매를 낳았다.
어린이집, 학교에 다녀오면 늘 엄마가 집에 있고 아이들을 맞이해 주고 싶었다. 간식도 준비해놓고 날이 궂은날에는 우산을 들고 데리러 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엄마의 손길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을 그때까지는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어린 내가 느꼈던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외롭지 않게, 아이들에게 집이 따뜻한 공간이었으면 했다. 결혼하고 가족을 이루는 것이 싫다고는 했지만 아마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나 보다.
셋째를 가지면서 10년 가까이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사실은 회사에서 아이들이 다 크거든 오라고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업주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했던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후회가 남지 않게 이 시간을 보내야지, 아이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 줘야지 다짐을 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고 했으니 어린 날의 나도 보듬고, 내 아이들도 따스함으로 감싸줘야지.
그렇게 스위트홈은 내가 만들어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