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일기 셋.

by 김구일

소라야, 그날의 여름을 떠올려봐. 나는 까치발을 들어. 혹시 네가 보이지 않을까, 발가락에 온 힘을 모아. 너의 정수리가 보일락말락 해. 두 발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대열에서 벗어나. 흐트러진 줄을 참지 못한 선생이 노려봐.

네가 돌아봐. 네가 웃어. 여름날의 볕처럼 강렬하게. 사실은 말이야. 늘 함께였어.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매점에서도, 버스에서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졸업식 때도, 입학식 때도, 거리에서도, 영화관에서도, 술집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골목에서도.

너의 웃음과 숨결과 손짓과 몸짓과 애정을 공유하고 있었지. 왜 좋았냐면 글쎄, 그냥 좋았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 고개를 들면 언제든 보이는 달.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달. 늘 지켜보고 있던 건 나인데.

어느 날부터 옆에 걔가 있더라. 화가 났어. 달은 홀로 떠 있을 때가 아름답잖아. 먼발치에서 봐야 할 뿐, 가질 수 없는 존재라고. 그런데 주인행세를 하는 거야.

너는 그저 이해만 해주면 되는데, 너에게 바라는 건 고작 이해 하나뿐이었는데. 배신당한 허탈함을 네가 알까. 싸구려 같은 년. 네가 웃을 때마다 위장이 뒤틀려. 흘리는 웃음 좀 버리라고 했잖아. 과시하는 차림도. 친절한 목소리도. 상냥한 얼굴도. 간절히 부탁했잖아. 뭐든 말해달라고. 알아야 널 보호할 수 있다고 말이야.

네가 무얼 먹고, 누구와 연락하고, 누구와 만나는지 말해주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왜 자꾸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나쁜 건 너인데. 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내가 규칙을 만들었던 건 너의 바람 때문이었어. 평범하게 사는 법은 간단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면 되잖아.

하지 말라는 걸 하지 않고, 먼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 그것만 지키면 행복할 수 있는데 왜 자꾸만 엇나가는 거야. 네 몸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규칙이었잖아. 무수히도 지켜왔던 규칙. 붓으로 너의 몸에 경을 새겨야만 비로소 네가 나에게 용서를 구했지.

그때마다 나는, 네가 깨달았다고 생각해. 깨닫지 못했다면 나의 품에 파고들지 않았을 테니까. 너를 용서할 때마다 죄책감이 쌓여가. 너의 죄책이 나에게까지 전이 돼. 너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크게, 용서해달라는 말보다 크게, 나를 버리지 말라고 해.

사랑에 간섭과 집착은 당연한 거야. 내가 늘 말했잖아. 간섭과 집착이 줄어들수록 불안이 커질 거라고. 그런데 걔를 만나고 난 후부터 서서히 변해가더라. 나의 걱정이 간섭으로, 관심이 집착으로, 권유가 강요로 왜곡돼. 나의 마음을 기만한 시점이 어디서부터였을까. 내가 너를 선택했고, 네가 나를 따라왔잖아.

그런데 왜. 나를 사랑해서 만나놓고 왜. 너의 불행을 알아봐 준 유일한 사람에게 왜. 도대체 왜.

난 그때 너를 보았어. 골목에서 담배를 꺼내든 네가 나를 빤히 보더니 웃더라. 착했고, 밝았고, 불쌍했어. 웃으면서도 울고 있었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어. 가르쳐주고 싶었고, 지켜주고 싶었어. 너만은 나를 이해한다고 여겼어.

그런데 왜. 너는 왜 걔에게 돌아가려고 했을까. 너의 치욕스러운 밑바닥까지 들켜버린 나에게 무얼 원했던 걸까. 소라, 너는 알 거야. 사람이 갈구할 때 얼마나 밑바닥을 보이는지. 너는 그 애와 잤을까. 그 애는 너와 잤을까.

벗으라면 벗고, 기지개를 켜라면 켜고, 가만히 누우라면 눕고,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면 입을 다물고. 욕망 가득한 눈에, 벌어진 입에, 일렁이는 목젖에, 출렁이는 가슴에, 작은 배꼽에, 울창한 숲에, 가는 허벅지에, 종아리에, 발등에, 발가락에.

걸을 때도, 먹을 때도, 웃을 때도, 싸울 때도 너는 솔직하지 않았어. 구차하게 너의 불행을 숨겼지. 아름답게 남고 싶었던 거야? 그래, 내가 지켜줄게. 지켜준다고. 지긋지긋하다. 널 이해시키는 일이. 조금은 지치기도 해. 그래도 잊지 말았으면 해. 네가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하고, 불쌍한 아이인지.

미안해. 내가 조금 흥분했다. 두서없는 말은 싫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서 마무리 지으려고 해. 도망친 널 생각할 때면 정신이 돌아버릴 때가 있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그럴 때면 숨 쉴 구멍을 찾아야 하는데. 시곗바늘이 얼마나 제자리로 돌아와야 내가 안식을 찾을까. 약속해. 끝까지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소라야, 내가 언제까지 널 용서해야 하는 거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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