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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미르 Feb 29. 2024

THE GREAT STORY 4

바람을 멈추는 마법의 이야기 - 축치족을 찾아 

혁명가, 축치를 만나다


1889년 제정 러시아 시대.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24세의 젊은 유태인 블라디미르 게르마노비치 보고라스는 황제에 반역한 죄로 재판에 회부된다. 당시 러시아를 휩쓸기 시작했던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하여 '인민의 의지'라는 비밀 써클에서 활동한 혐의 때문이었다. 그에겐  시베리아 유형 10년이 선고된다. 


유형지는 모스크바에선 무려 6천5백 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추코트카 반도의 스례드녜 콜리마라는 곳이었다. 하바롭스크나 이르쿠츠크 같은 시베리아의 새도 시들은 상대적으로 기후조건이 좋은 아무르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고 유배 온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살고 있었지만 추코트카는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콜리마까지 죽지 않고 도착할 수 있을지.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생존의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러나  보고라스의 운명은 그 죽음의 땅에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전설적인 부족, 축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시베리아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싶은 러시아 왕조의 욕망이 맞물려, 보고라스는 축치연구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는 운 좋게 맡은 일에 열정을 쏟았다. 축치들과 함께 3년 동안 살아가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기록하고 이야기를 수집했다. 축치는 그에겐 구원이었고 희망이었다. 

현재 축치족 자치주의 주도 Anadyr가 오른편 맨 위쪽에 표시됨. 모스크바에서 얼마나 먼 곳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출처: 구글)


 툰드라에 겨울이 오고 눈폭풍이 몰아지는 날이 오면 축치들은 그들의 텐트 안에서 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이야기에 바람을 멎게 하는 마법이 있다고 믿었다. 바람이 멈추지 않으면 사냥을 나갈 수 없고 귀중한 순록도 얼어 죽을 수 있기에, 그들은 모든 이야기 끝에 '바람아, 멈추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보고라스는 생선 기름이 담긴 등잔을 켜고 얼어붙은 잉크를 녹여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적는다. 천막 밖에는 죽은 조상의 시신이 놓인 돌무덤이 있고 그곳엔 흑요석 발굽에 코에서 불을 뿜는 순록들이 어슬렁거린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툰드라 저 멀리엔 축치들의 말처럼 악령 켈레가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축치들처럼 유빙을 타고 바다 코끼리를 잡으러 나가면 그곳에서 말하는 고래를 만날 수 있을까. 축치들은 악령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순록의 피를 바른다. 그리고 보고라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보고라스의 기록에 빠져 든다. 


             

축치족은 오래전 아무르강 유역에서 북진하여 오늘의 추코트카 반도에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진 몽골-투르크계 부족이다. 주변 다른 부족보다 몸집이 크고  어릴 때부터 사냥 등 생존기술을 혹독하게 익혀 싸움에 능하고 거칠다. 

 1816년에 그려진 축치족의 모습. 전통가옥 '야란가'가 뒤에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툰드라에서 살아가기


축치족 몇몇이 유빙을 타고 베링해로 사냥을 나갔다가 한 섬으로 흘러들어 그곳의 축치들을 만난다. 그들은 서로 식량과 재산을 빼앗으며 반목하다가 나중엔 그릇과 바다코끼리 고기를 나누며 화해한다. 섬에는 샤먼(무당)이 있었는데 그와 육지의 샤먼은 힘 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육지의 샤먼은 자신이 가장 뛰어난 샤먼이라 생각했으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섬의 샤먼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육지 샤먼은 섬 샤먼에게 간청하여 서로의 능력을 나누어 갖자 하고, 섬의 샤먼이 이에 동의하여 그들은 서로의 힘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육지 샤먼은 자신이 새로 익힌 대단한 능력을 자랑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시험해 보고자 아이들을 죽이는 '존재'를 잡아오라고 한다.


육지의 샤먼은 땅속 어둠으로 들어가 여러 '존재'들 사이에서 아이들을 죽이는 '존재'를 찾아 몇 날 며칠을 고생하다가 땅의 어둠에게서 아이들을 죽이는 악령인 '단순한 입'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단순한 입'은 노파의 모습을 하고 커다란 입에 말라붙은 피를 잔뜩 묻힌 악령이었다. 그를 잡아가자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주술이 걸린 풀로 만든 밧줄로 그를 묶고 심문한다. 악령은 벌벌 떨며 자신은 '화가 난 것들'의 사주를 받았을 뿐이라며 다시는 아이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사람들은 이 악령을 풀어주었고 아버지는 육지 샤먼에서 다시 '사람들을 죽이는 죽음'을 찾아오라고 한다. 샤먼은 땅속의 갈라진 틈을 돌아다니다가 강력한 악령인 '이우메툰'을 잡아 온다. 사람들이 이우메툰을 풀로 된 밧줄로 묶고 고문하자, 그는 울면서 자신은 다른 땅의 악령들이 시켜 그리한 것뿐이라며 병을 다스릴 수 있는 제물을 바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래도 사람들이 풀어주지 않자 바다코끼리와 고래를 많이 잡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고 자비로운 존재가 될 것을 다짐하고서 겨우 풀려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우메툰의 말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바람아, 멈추어라. 



축치족의 세계는 수 많은 '존재'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이 말하는 '존재'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 즉 혼령들과 동물, 괴물 등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폭넓게 가리킨다. 심지어 천막 속의 식기구들이나 나무토막, 요강까지도 '존재'로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간다. 이들 비인간적 존재들은 때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며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성적 관계도 가지며 서로의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축치들이 생각하는 '존재'에는 하나 이상의 여러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속은 죽은 후 환생하기 어려운 이들(환생은 두 번까지만 가능하다)과 그들이 만들어낸 여러 악한 기운으로 뭉친 악령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익령 '이우메툰'은 갈라진 툰드라의 틈새로 빠져나와 여행자를 습격하고 홀로 다니는 이들을 납치하며 때로 작은 벌레가 되어 인간의 머리에 구멍을 뚫고 들어온다. 축치들은 이러한 악령의 해를 입어 신경증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축치족이 직접 그린 악령의 그림. 땅속에 사는 여러 '화난 존재'들의 모습이다. 왼쪽 악령은 눈알이 튀어나와 매달려 있고 오른쪽은 눈이 하나이다. 





축치들에게 죽음은 이런 악령의 소행이기에, 이들을 잡아 없앨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린아이의 죽음과 질병을 피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위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악령들은 샤먼에게 재물을 바치는 방법을 알려준 후 인간의 방심을 틈타 끝내 인간을 배신한다. 이야기를 통해 보면, 축치들은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을 일으키는 악령들을 잡아올 정도의 힘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항할 수 있다. 축치들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보다는 이처럼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은 환생하여 가족의 곁으로 돌아온다고 믿었으며 때로 죽은 이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황무지에 외따로 살아가는 가족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은 순록을 치러 나갔고 아내와 아이들만이 눈보라치는 툰드라의 야란가(천막집)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야란가 뒤에는 돌로 쌓아 놓은 둥근 풍장터가 있었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시체가 놓여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밤, 누군가 천막을 두드렸다. 아내가 등잔불을 들고나가니 눈보라 속에 낯선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아내는 여자를 천막 안으로 인도하자, 여자는 말했다.

"당신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지금 악령 켈레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당신들을 노리고 옵니다."

그리고 천막 안에 있는 작은 개를 보고 또 말했다.

"이런 작은 개는 필요 없겠지요. 자, 나를 따라와요."


아내는 여자의 말을 이해했다. 밖으로 나가 개를 죽여 그 피를 천막 근처에 빙 둘러 뿌렸다. 여자는 사라졌고 깊은 밤 켈레의 무리가 썰매를 몰고 달려왔다. 켈레는 순록이나 개가 끄는 썰매가 아닌 거대한 늑대나 여우가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며 흰 가죽 옷을 입고 긴 창을 들고 있다. 그들이 모는 늑대와 여우의 눈에서는 붉은빛이 쏟아지고 그들에게 잡히면 머리를 뜯긴 후 먹이가 된다. 켈레들은 천막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개의 피가 뿌려진 곳을 넘지 못했다. 켈레들은 밤이 새도록 핏자국을 넘을 방도를 찾았으나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 다음날, 남편이 와서 죽은 개와 핏자국을 보고 무슨 일인가 묻자, 아내는 자신이 아이들을 지켰다고 말한다. 바람아, 멈추어라.


악령 켈레는 축치들에게 가장 흔한 '존재'로서 때로는 샤먼에게 부림을 당하며 인간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켈레는 인간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 이 이야기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천막 뒤 무덤의 주인이 같은 인간이 화를 당할 것을 염려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데, 그녀는 죽은 존재이다.  아내는 그 존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집안에 들이며, 그가 말해준 켈레 퇴치의 방법을 이해한다. 아내가 행한 피방주술(악령을 피하고 방어하는 주술)은 귀중하고 친근한 존재를 재물로 바쳐야 한다. 개는 예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존재였기에 개의 피는 강이 되어 켈레들이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 된다. 축치들은 죽은 이들을 툰드라의 벌판에 풍장하는 습속이 있었는데, 무덤 주위엔 둥근 형태의 돌을 쌓고 순록의 뿔을 갖다 놓는다. 이야기 속에서 축치아내는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죽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 그들의 세계는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 외에도 축치의 이야기들에는 거의 빠짐없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인에게 납치되었던 남매의 이야기에서, 아이들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지만 가족에게 돌아오자마자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죽는다. 왜 죽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순록의 귀에 생긴 거대한 고름덩어리에서 태어난 아기 켈레가 온 가족과 마을을 몰살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겨우 살아남은 한 명의 청년이 그 켈레의 머리를 잘라 살해하여 복수한다. 다른 이야기에선 캘레의 혼령이 빙의한 갓난아기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식구들을 몽땅 살해하는가 하면 툰드라에서 길을 잃은 여자는 켈레에게 부림을 당하고 켈레가 죽인 남동생의 인육을 먹는다. 참담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 속엔 근래의 여느 신화들과는 달리 전혀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신화적 세계가 꿈틀거린다. 


사람의 시체에서 나온 수의와 힘줄로 옷을 지어 입은 검은 악령들의 다양한 이미지. 하체가 없는 악령(a), 귀와 꼬리가 달린 악령(b), 다리가 많이 달린 악령(c), 각종 동물의 모양을 한 악령(d, e, f, g) 이들은 모두 입이 크고 입안은 이빨로 가득하다. 보고라스는 축치들이 그린 그림에 알파벳 순서를 매기며 자세히 기록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초월적인 존재들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축치들이 숭배하는 태양은 빛나는 옷을 입고 하늘을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표현되며 그가 타는 순록의 뿔은 구리로 되어 있다. 사냥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바다의 혼령은 작은 노인으로, 땅의 지배자 누테누트는 예쁜 딸들을 데리고 철로 된 집에서 잔치를 즐기며 크게 숨을 내쉴 때마다 사냥감을 잔뜩 내뱉는다. 


그러나 축치들의 이야기에는 투쟁과 죽음, 그와 관련된 악령들의 이야기가 훨씬 많은데, 이는 아마도 혹독한 기후와 부족한 식량, 그리고 수렵생활로 인해 늘 고통과 죽음에 가까이 있으며 형성된 의식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들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악령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그 어떤 지고한 신들보다 생생하게 느껴진다. 축치들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고 한 편에서 다른 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종교학자들은 삶과 죽음이 연결된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뫼비우스의 띠로 설명하기도 한다. (출처, 구글)


맞대결 


축치들이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데에는 그들의 '자발적 죽음'이 큰 역할을 했다. 축치들 중 남자들은 노인이 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들은 그런 죽음을 '맞대결'이라고 부른다. 켈레나 다른 악령에 의해 영혼을 잠식당하여 병든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죽는 것을 축치들은 큰 수치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로 친지나 가족들, 특히 아들들 중 하나에게 죽임을 부탁하고 그 부탁을 받은 이는 반드시 이를 이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맞대결'을 실행하기 전 가족들은 그런 죽음을 최대한 말린다. 그래도 설득에 실패하면 세 가지 방법으로 '맞대결'이 실행된다. 상대를 마주 보고 칼로 찌르는 방법, 천막 밖에서 긴 창으로 찌르는 방법. 그리고 가장 숭고하고 깨끗한 죽음으로 여겨지는 방법으로 여자들의 무릎을 베고 교살당하는 방법이 있다. 보통 두 명의 여자가 양쪽에서 끈을 당겨 '맞대결'을 이룬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198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라야마 부시코>에는 70이 넘는 노인을 '나라야마'에 버리는 풍습이 소개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축치와 가까운 코랴크족, 이텔멘족, 야쿠트족에게도 유사한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 때문에 이들 부족과 우리나라의 고대 부족을 엮어 이해하려는 흐름도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축치들의 이런 관습과 인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존을 위한 역설적 강인함으로 이어진다.  가혹한 생존조건으로 인해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이들이 '맞대결'을 선택하지만, 이는 다른 이의 생존을 용이하게 하며 스스로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자가 되어 환생한다. 특히 가족의 일원으로 환생하여 극단적이지만 완벽한 가족 서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 


경제적 요인만이 '맞대결'의 원인은 아니다. 삶에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종종 이런 죽음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존중받는다. 그것은 일종의 안락사이기도 하고 명예로운 죽음이기도 하며 죽음에 대한 최대한의 선택권이기도 했다. 학자들 간에 다소의 이견은 있으나, '맞대결'은 축치들의 세계에서 드물지 않은 현상상이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러시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120년의 사투로 이어졌다.


서풍, 그치지 않는 바람 


16세기말, 러시아는 우랄산맥을 넘어 '잠자는 땅' 시베리아로 한 발씩을 내디뎠다. 투르크어로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코사크족들이 용병으로 앞장섰고, 도망친 농노나 죄수, 무뢰배들과 반체제 인사들이 합세했다. 목표는 모피획득이었다. 이미 씨가 마른 유럽의 모피 동물들을 대체할 엄청난 동물들이 살고 있는 시베리아는 운 좋으면 한 몫을 단단히 챙길 수 있는 모험의 땅이 되었다. 코사크들은 여름엔 큰 강들을 따라, 겨울엔 썰매를 끌고 시베리아로 들어와 검은 담비와 흰 여우, 회색 곰과 해달을 수 천마리씩 사냥했고  원시적 무기밖에 없던 원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재물을 약탈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러시안들의 전진기지였던 야쿠츠크의 매음굴이나 노예시장에 팔았고 남은 이들에겐 야삭(세금)을 매겼다. 코사크와 러시안들이 가는 길에는 언제나 핏물이 흥건했다.


코사크들이 축치와 맞부딪힌 것은 처음 시베리아행이 시작된 후 50여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제 극동의 끝까지 달려온 코사크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원주민들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다. 축치는 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리한 싸움이 벌어질 듯하면 모든 가족을 죽이고 전투에 나섰다. 표트르 대제의 명으로 축치의 씨를 말리려 했던 군인 파블루츠키는 '아나디르 파티'라는 특수부대를 편성, 눈에 보이는 모든 축치 마을을 불태우고 대량학살을 자행했지만 결국 축치에게 죽임을 당하여 머리가 소금에 절여진 채 몇 년이나 조리돌림을 당했다. 사로잡힌 축치들은 자결을 택했으며 사로잡은 러시아인들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렇게 축치는 단 한 번도 러시아에게 정복당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야삭을 바치지 않은 채 18세기말 평화협정을 체결, 자치권을 획득했다. 


그렇게 축치들은 자신의 땅을 지켰고 자존감을 잃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러시아에서 불어온 서풍은 그 후로 더 맹렬하게 불어왔으니 말이다. 근대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제국의 칼날은 축치들을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가난과 고립으로 몰아갔다. 세기가 바뀌고 민중을 위한다는 혁명이 성공했을 때, 축치의 땅은 진짜 악령이 들끓는 지옥으로 돌변했다. 


20세기 들어, 쓸모없는 땅인 줄만 알았던 추코트카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악령 켈레와 이우메툰이 몽땅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을 듯한 독재자 스탈린이 전대미문의 수용소를 세우기 시작했다. 콜리마, 마가단 그리고 순록도 욕을 한다는 부투기차그. 축치들의 땅은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을 짓누르는 무서운 이름이 되었고 아우슈비츠의 형제가 되었다.  그곳에 들어선 죽음의 수용소는 '맞대결'을 꿈꿀 수 없는 값싼 죽음만이 횡횡했다. 죄수들은 금광에서, 우라늄 광산에서 죽어나갔고 일명 '뼈 위의 도로'로 불리는 콜리마 대로 건설을 위해 일하다 쓰러져 그대로 길 위에 묻혔다.


스탈린 시절 17년간의 콜리마 수용소 이야기를 써낸 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 작가는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수용소에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탈린이라는 악령이 사라진 이후로도 시베리아의 자원을 위한 개발과 착취는 계속되었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속속 발견되고 대규모 유전이 들어섰다. 축치들의 땅에도 그 보물들이 숨어 있었다. 소련 시절에는 국영기업들이, 소련이 망한 다음에는 민영화된 기업들이 들어섰다. 러시아에는 시베리아의 국영기업들을 인수한 신흥 재벌들이 넘쳤고 러시아는 자원의 힘을 동원해 서방에도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로만 이브라히모비치 같은 30대 거부들이 수십 조원의 자산으로 영국의 명문 축구구단 첼시를 인수하여 구단주가 되었다. 서방은 충격을 받았지만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검은 황금의 힘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러시아의 석유재벌이며 추코트카의 주지사를 역임한 이브라히모비치. 그는  추코트카의 시추권을 따내어 재벌이 되었다. 아나디르는 그가 세운 '레고랜드'로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축치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고립되어 있다.  이미 오래 전, 보고라스는 축치를 연구한 성과를 인정받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공산당의 고위 간부가 되어 생을 마쳤지만 축치들의 삶은 달라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간다.  기후변화로 유빙이 녹아 바다코끼리가 보이지 않아도, 석유와 천연가스가 남의 손으로 몽땅 넘어가도 그들은 그곳에 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겨울에 입을 열면 말들이, 수많은 말들이 얼음이 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그리고 그 떨어진 말들이 봄을 맞아 녹으면, 온 대지에는 이야기들이 넘쳐난다고 말한다. 청춘들의 이야기, 겨울을 넘긴 노인들의 이야기, 해마와 북극곰과 늑대들, 순록의 이야기도 있고 천막 뒤에서 얼고 있던 똥들도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어쩌면 안류가 멸망해도 축치는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덴마크의 인류학자 라네 빌레르슬라우의 최근의 현장 연구에 의하면, 2008년경에도 죽음과의 '맞대결'이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단다. 


러시아 재벌이 '세워준 ' 레고시티의 골목구석엔 아직도 켈레가 숨어있고 깊은 밤이 되면 악령 렉켕이 두 팔을 땅에 끌며 방황하는 곳. 시베리아 전사의 후손들은 새벽의 여명을 기다린다. 바람아, 멈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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