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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미르 Apr 29. 2024

THE GREAT STORY 5

   Small stories, Universe of Mind      

미신(迷信)?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너랑 우리 현이랑 둘다 올해 삼재란다. 잘 넘겨야지. 내가 준비한 게 있어. "    


언제나처럼 내가 반발하지 않을까하여 조심스러운 톤으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자니 이번엔 또 뭔가 싶어 걱정이 앞선다. 겉보기엔 스님같지만 알고 보니 무속인이었던 동네의 그 젊은 남자에게 점을 보셨나. 아니면 지난 번처럼 나의 영업장까지 오셔서 몰래 부적을 붙이고 가신 것은 아닐까. 이사갈 때의 여러 당황스런 일들도 연달아 떠올랐다. 현관문 위에 가위를 매달아 놓고 그 위를 액자로 가려놓은 것은 그렇다 쳐도, 내 방 침대의 네 귀퉁이에서 발견한 작은 부적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네 속옷 있잖아. 기왕이면 팬티 가져오면 좋단다. 그거 날짜 받아서 태워야 한데. 그리고 우리 애기 깔고 잘 부적을 줄테니 3일은 깔고 자고 3일은 도로 걷어 놓고...그렇게 3주 해야 한단다 그것두 나중에 태워야 한다니 조심해서 다뤄야 해."     


내가 신화를 좋아하고 전통적인 샤머니즘 의례를 연구하지만 시어머님의 그런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이런 종류의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배척당하거나 거부되기 일쑤이고 나 역시 그렇다. 그러면 나는 편리한 데로 '공부는 공부고 현실은 현실이다.'라고 편리하게 생각해야 할까. 그것은 양심에 걸리는, 너무나 큰 간극이다. 그러나 그 간극이 간극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어머니라는 매우 어려운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우리의 일상속에 녹아 있는 작은 신화적 이야기들을 뒤쫒아 가 보려 한다. 



 칼 융 - 바보야, 문제는 무의식이야!      



일상의 신화적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칼 융의 분석 심리학을 살펴보려고 한다. 칼융은 그 누구보다도 신화와 이야기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간의 이해와 연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원자의 구조를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여러 가설과 실험으로 그 존재를 그려내는 것처럼, 마음에도 구조가 있다. 인간의 정신과 내면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이트가 많은 연구를 행했고 그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간의 마음에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어, 의식과는 다른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사실 칼 융은 프로이트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는 욕도 많이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공자도 별로 많지 않고 그의 이론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학력평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심리학 분야에서 큰 스승으로 인정받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제자들에 의해 ‘대샤먼’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을 정도로 샤머니즘이나 고대종교에도 정통했다. 그런 그의 견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알맹이는 바로 ‘무의식’에 대한 정의이다.      

융이 제시한 정신의 구조는 위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정신세계의 가장 바깥쪽에는 의식이 있고 안쪽에는 무의식이 있다.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있는데, 개인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 배제된 생각이나 감정, 기억이 존재하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그림자'가 있어  자아의 가장 가까이에서 자아에 의해 억압된 '또 하나의 나'를 감추고 있다. 개인 무의식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는 집단 무의식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무의식이다. 융에 따르면 의식에 존재하는 자아가 무의식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들을 의식으로 통합하는 과정, 즉 '무의식을 의식화'할 때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고 조화로운 인간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융에게 있어 인간의 행복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고 그 실현의 핵심에는 무의식이 있다. 

     

무의식’은 프로이트로 인해 유명해진 개념이지만, 오래전 고대의 학자들도 생각했던 개념이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흔히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등의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 말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무의식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융의 무의식은 그 범위가 매우 넓고 기능도 다양하다.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욕망과 억압된 의식의 저장고만은 아닌 것이다. 융에게 무의식이란 의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 요소가 모여있는 곳이고 창조성의 근원이며 무한한 잠재력의 원천이다.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갖고 지나친 의식 편향성을 조절하려는 힘을 발휘하며 그 힘은 대단히 강하고 때로는 파괴적이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 무의식적 요소의 의식화를 통해 인간은 인격의 성숙과 확장을 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인격인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거대한 바다인 무의식은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니다. 무의식은 오로지 신화, 상징, 의례, 이야기 등 다른 대상에 투사되어 나타나기에 '이것이 무의식이다'라고 체험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화의 연구가 중요한데,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고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정신의 원형이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시어머니를 떠올렸다. 그이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경남 밀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19세라는, 당시로서도 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위대한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자신의 소설이 대부분 노인네들의 옛이야기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시어머님은 15세쯤 되던 어느날 부락제가 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부락제는 예전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치러졌던 축제이자 굿이었다. 나는 부락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강릉의 단오제를 보러 간 적은 있으나 이미 지자체의 행사로서 관광상품화 된지 오래인지라 시끌벅적한 지역축제로만 남은 것에 아쉬움만 안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런데 책 속에서만 존재했던 그 부락제를, 이제는 거의 다 없어져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원형 그대로의 부락제를 시어머님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시어머님의 아버지가 제비뽑기로 제사장이 되었던 그해, 그이의 아버지가 매일 목욕재계하고 고기도 먹지 않는 등 금기를 철저히 지키며 15일을 보냈던 일을 시어머니는 주절주절 이야기한다. 농삿일이 늘어나는 것이 너무 싫어 우물가 한 켠에서 눈물을 삼켰던 일도 차분히 이야기했다.      


마을굿이 끝나고 벌어진 한바탕 놀이판은 굿과 더불어 부락제의 하이라이트였다. 해당 마을 뿐 아니라 주변의 마을에서도 열일을 제치고 놀러를 왔다. 걷지도 못하던 할머니가 아들의 등에 업혀 왔고 동네 아주머니 누군가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손질해 둔 장구를 메고 왔으며 누군가는 소고를, 누군가는 쇠를 들고 왔다고 한다. 평소 근엄하던 마을 어른들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놀이판으로 끼어든다. 그리고 이웃 마을서 구경 온 청년들과 그 청년들을 훔쳐보았던 마을 처녀들의 가슴은 얼마나 크게 뛰놀았을까. 그 처녀들을 지킨답시고 몽둥이를 들고 낯선 남자들을 감시하던 같은 마을의 젊은이들의 가슴도 같이 뛰었으리라. 놀이패들이 마을 공터에서 재주를 넘고 줄을 타고 불을 뿜었던 그날 여자 아이들은 부모들 몰래 마을의 청년들과 표충사까지 놀러 나갔다가 한밤중에 들어와 회초리를 맞았다. 그리고 시어머님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도대체 왜 부모 말을 어기고 표충사까지 놀러를 댕기나 몰러. 어른들 말씀을 잘 들어야지.’      

하늘이 낸 효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효를 가장한 잔혹사인가.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 어린 아이는 종종 살해되고 유기되었다. 때로 신화는 이데올로기와 연합하여 지배이 수단이 된다. 사진은 <삼국유사>의 '손순매아' 부분


그곳은 1960년대에도 타성받이가 같이 살기 어려웠던 씨족단위의 산골마을이었다. 그이의 지역에선 밀양 손씨가 갑이었다. 다른 씨족들은 소수이고 가난했다. 그이는 시집간 후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며 시가의 어른들에게 종종 좋잖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양반, 그것도 좋은 집안의 양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이 횡횡했으니 제사를 받드는 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그래야 ‘진짜 양반 집안’으로 알아준다고 했다. 시어머님이 소중하게 간직한 시가의 족보에는 맨 첫페이지에 집안의 시조인 손순의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손순매아, 바로 그 이야기이다. 늙은 노모의 반찬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이를 땅에 묻고 효를 실천했다던 그 이야기를 그이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효’라는 한 글자를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당신의 손자에게도 그 이야기를 물리려고 했었다. 그뿐인가. 밀양뿐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귀신 이야기인 ‘아랑 낭자’에 대해서도 여러 버전으로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한다. 여자는 그저 정조를 목숨처럼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처녀귀신 이야기인 '아랑' 이야기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유교적으로 각색한 흔적이 엿보인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관리이며 남자인 사또이다. 밀양에서는 아랑각을 세워 아직도 아랑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림은 아랑각에 그려진 설화의 한 부분. 


융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시어머님은 아주 오래된 무속적 원형이 살아 있는 곳에서 자랐고 그것이 집단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고 말이다. 집단 무의식은 매우 강력한 힘이 있어 유교, 불교와 섞여서도 그 생명을 간직한다. 그렇기에 무속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고 결국 분출되어 나왔다고 말이다. 그 뿐인가. 마을과 집안 공동체에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은 그이를 교육했고 그에 따라 그이는 ‘순종’이라는 생존전략을 몸으로 익혔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가면이었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데로, 그이는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아내와 어머니로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시아버지마저 먼저 보내신 후, 그이는 좀더 자유롭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가고 싶었던 절에 다니고 부적을 쓰며 연등제 때는 등도 올린다.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의 제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제사를 줄이거나 없애기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다.  무속적 믿음이 강요된다고 느끼거나 조상을 모시는 방식 때문에 이러저러한 갈등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의미가 없는 제사,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제사, 남자의 조상만을 위하는 제사는 지내기가 싫었다. 어머님이 가져오라 했던 속옷도 끝내 갖고 가지 않았으며 아이를 위해 마련하셨던 거대한 부적은, 죄송한 일이지만 포장도 뜯지 않고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엔 설날에 우리 가족을 위해 써 오신 부적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말년의 융. 그는 무의식에 사로잡혀 무의식이 하라는 데로만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무의식이 아무리 중요해도 더 중요한 것은 의식과의 조화이다. 


시어머님의 이야기는 가공되지 않는 원석과도 같았다.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인류학의 보물창고, 신화의 저장소였다. 그런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듣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나의 인식이 더 넓어지는 것만이 오랜 고부관계에서 내가 진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인 듯 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이야기도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그리하여 융의 제안들이 과연 유효한 것이지 실험해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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