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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미르 May 02. 2024

니가타




무엇부터 말해줄까. 아, 말 편하게 해도 되겠지. 자네가 나보다 한참 아래일테니 말이야. 눈, 눈 얘기부터할까. 여기, 이곳, 니가타라는데는 그저 눈이야. 눈으로 고통받고 눈으로 벌어먹지. 한겨울엔 어른 키만큼이나 온다네. 하루종일 바람에 눈이 펄펄 날리고 그쳤나 싶어도 또 꽃잎처럼, 봄날 꽃잎처럼 조용히 흩어져 떠돈다네. 어둠속에서도 그 마지막 꽃잎들이 춤추는 걸 볼 수 있지. 여기  후루마치는  니가타에서  제일 오래된 곳이야. 뱃사람들을 접대하던 게이샤들의  동네지. 난  평생  후루머치이와  항구를 오가며  살았다네. 생선을  나르고  손님을  태워오며  말이야.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운명 을  결정할 수  있을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그때, 59년 12월이었지. 날짜도 기억해. 12월 18일, 그날은 싸락눈이 내렸어. 가볍게 도로를 덮었지. 그리고 까맣게 경찰들이 나타났어 . 조선인들이  여기  니가타를 집어삼킬 듯  몰려왔으니까. 남한사람들은 그 이야길 잘 모를 걸. 요즘 세대들이야 말할 것도 없구. 일본에서 살아가던 100만 재일동포들이 매해 수만명씩 '귀국'하던 그때 그 기묘한 일을 말이지. 자네는 이미 알겠지만 반도에서 전쟁이 나고서  일본은 한숨을 돌렸어. 다 죽어가던 나라가 스멀스멀 살아나더군. 그러더니 갑자기 조선인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이것저것 제약을 걸기 시작했어. 건강보험, 연금제도, 이런 것에서  몽땅 제외됐지. 그게 무슨 뜻이었겠나. 나가라는 거지. 이 땅에서 꺼지라는 거. 그때 갑자기 북조선에서 동포를 받겠다고 나설 줄 누가 알았겠나. 안 그래도 재일사회에선 북조선에 대한 지지가 강했으니 오라는 말에 다들 혹할수 밖에. 그래서 그렇게 밀려들었다네. 해일처럼, 기차를 꽉꽉 채워 타고 북한 국가를 부르면서 말이지. 아,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까. 그때 미친듯이 북조선 만세를 외치고 거길 가면 굶지 않느다, 직장을 얻을 수 있다, 대학을 다닐 수 있다, 통일된 조국에서 살 것이다, 이런 꿈을 꾸었던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 난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지만 말야. 그저 이 니가타에서 입에 풀칠이나 하던 형편이었는데, 때 아닌 대목을 만났어. 고물상에서 트랜지스터니 손전등이니 북조선에선 귀하다는 것들을 몽땅 쓸어다 팔았다네. 그 후로도 수년이나 이어졌지. 그 광기어린 행렬이 말이야.


그는 잠시 목을 축이러 더러운 유리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담배를 빼 물었다. 시커먼 곰팡이가 슨 벽지과 누런 오물이 베어든 이부자리가 어두운 불빛 아래서 담배연기를 빨아들었다. 방 안에는 플라스틱 물병과 빈 캔이 쓰러져 있고 금이 간 창문으로  굵은  눈발이  보였다. 아주 멀리서, 약한 함성도 간혹 들려온다. 늙은 남자는 동그란 담배연기를 만들어내며 쿨럭거렸다.


흠, 오늘로 2000년이구먼. 그래서 저리 시끄러운가.

새 밀레니엄이죠.

나하곤 상관없어. 세월을 잊은지 오래라서.

하지만 아직 안 한 이야기가 있지요.

그런가? 자네는...서울서 잡지사한다고 했지?남조선이 많이 좋아졌다며? 하긴, 이 담배만 봐도 알겠군.


남자는 여자가 사온 담배 한 보루에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자가 불을 붙여 준다.


뮈하러 이런 이야길 취재하누. 별볼일 없는데.

실은 서울이 아니고 제주예요. 제가 살고 일하는 곳이요.


늙은 남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눈앞에 앉은 여자는 흰 머리가 드문드문한 50대쯤의 중년으로, 작고 왜소한 몸집에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였다. 여자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순간, 동굴과 같은 깊은 눈매가 그의 눈길에 칼날처럼 꽃혔다. 밖에선 잠시, 느릿한 엔카의 곡조가 들려오다 사라졌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얼마나  결정할 수 았을까요. 나카무라씨, 아니, 본명대로 고경태씨라 할까요. 도살자, 인간백정이란 별명은 어떤가요. 그해, 그러니가 48년 제주에  당신이  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을 톈데. 그랬다면  그런  별칭도  없었겠지요. 총알도 아깝다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인 그 사람들 말예요. 유채꽃밭에 버려졌던 그 시체들은 거름이 되서 매년 땅을 기름지게 했다지요. 그런 당신이 갑자기 사라진건 언제였죠. 48년 겨울이었나요. 쓰시마로 가는 작은 어선을 타고 제주를 빠져나간건 알아요. 거기서 후쿠오카로 밀항선을 탄 것도 알아냈죠.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난 당신이 찾는 그런 사람아냐.

현명희

뭐?

현명희. 그 이름은 기억하겠죠. 당신의 선주 딸이었으니까요. 인근에서 따를 자가 없는 미모였다면서요. 고등학교까지 다닌 유일한 마을 아가씨, 인품도 그리 좋았다던 그 여자요.

난 몰라.

당신이 빨갱이로 신고했죠. 아무 근거도 없이.

기억  나!

그토록  삽시간에 운명이 뒤바뀌는  걸  어떻게 받아낼까요.어떻던가요. 손에 피가 묻으니 더 이상 겁나는 게 없던가요. 아니면 평소 한명희와 그 집안이 가진게 부러웠었나요. 그래서 그 무죄한 사람을 가두고 몇날며칠을 정신이 나가도록 범했나요. 나중엔 다른 남들도 줄을 서도록 만들었나요.

그만 해!

어떻던가요.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던, 손도 댈수 없던 사람을 짓밟는 것이요.


으아아하고 노인은 짐승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쇳가루를 들이마신것같은 거친 신음소리만 겨우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올 뿐. 뒤이어 폭풍같은 기침이 몰려왔다. 노인의 핏발선 눈에 눈물이 핑돌때까지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넌 몰라...넌...그 일이 있고나서 난 ...매일 악몽을 꿨다. 매일매일...도저히 그 섬에 있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그저 목숨만 부지하고 살았어. 숨만 쉬고 살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 예쁜것, 높고  순수한 그것을  손애 넣고  망가뜨리고 싶었지.


노인은 슬쩍 눈을 들어 여자를 바라보다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집었는지 방바닥을 굴러다니던 깡통따개가 들려 있었고 그의  손이 여자의 목을 향했다. 그러나, 금새 그의 몸은 무너졌다. 다시 기침이 이어지고, 그는 피를 뱉았다. 여자의  말이 차갑게 이어졌다.


 내가 태어날 때 어미는 목숨을 잃었지요. 윤간으로 임신이 된 어미는 제 새끼도 지킬 수가 없었으니까요. 전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사는 게 정말 힘들었답니다. 전쟁이었어요. 언제나  전쟁 이었고  48년아었죠.


여자는 가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담배를 방바닥에 눌러껐다. 희미한, 장판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서 아마 잊으셨겠죠. 제주엔 꽃이 많이 핀답니다. 당신이 피운 담배엔 특별한 꽃의 즙을 넣어 두었어요. 협죽도라고 하죠. 분홍으로 어른어른하게 피는 그 꽃, 기억하시나요. 청산가리보다 쎈 독이 있지요. 내 어미는 그 꽃을 먹고 세상을 버렸답디다.


그는 방바닥을 기었다. 팔한팔 바닥을 밀며  샷시로 된  차가운  출입문 앞에 왔을 때  그의  의식은  이미 희미해졌고  허리 아래는  돌이 된듯 무감각해지며  뻣뻣이  굳어갔다.  그는  가슴을  쥐어짜는 극심한 통증을 견디며 차가운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그의 몸은 풀썩  문밖으로 반쯤  걸쳐졌다. 고개를  돌려, 그는 어두운 어시장  뒷골목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전기에  감전된  동물처럼, 그는  몸을 움찔이며  소리없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쿨럭쿨럭 헐떡이는 기침과 함께  핏방울이  눈위로  붉은  점을  만들고  그 옆으로  상처투성이의  맨발이  다가왔다 . 적막뿐인  좁고  허름한  뒷골목에  상처투성이 맨발의  주인공은  두  다리  사이에서  핏물을  흘리며  그의  곁에  섰다.  노인은  찢어진  치마저고리를  입은  그 처녀가  수십년간  자신의  꿈과  현살을  넘나들던  그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방 안에 앉아있던 여자는 잠자코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동요없이, 여자는 축 늘어진 시신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안녕, 아버지. 나를 태어나게 해 준 사람.  그이는 작고  가지런한  발자국 남기며 또박또박 걸어나왔다. 오랜 원한들을 덮어버리듯 함박눈이 발자국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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