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몽골비사> 다시 읽기 (사진출처: 네이버)
흰 사슴의 이야기
몽골은 지명이기도 하고 국가의 이름이기도 하며 종족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 800년 전 대제국을 이룬 칭기즈칸과 그의 직계 아들들이 이룬 나라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몽골보다는 12-13세기 세계적 대제국이었던 몽골이 모두의 관심사이다. 몽골의 전사들이 얼마나 활을 잘 쏘았는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탔는지, 유럽의 기사들을 박살낸 전략은 무엇이었는지. 그러한 전사들의 옆에는 몽골의 신성한 푸른 늑대가 함께 달린다. 늑대는 적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용맹하고 영리한 동물이며 몽골 초원의 상징이다. 그러나 몽골인의 손으로 쓴 것으로 몽골의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 <몽골비사>에는 늑대와 짝을 이루어 몽골을 탄생시킨 흰 사슴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몽골비사>의 제1장 1절은 이렇다.
지고하신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난 부르테 치노(잿빛 푸른 늑대)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코아이 마랄(흰 사슴)이었다. 그들이 탱기스를 건너와 오난강의 발원인 보르칸 성산에 터를 잡았다.
우리는 <몽골비사>라는 귀중한 텍스트를 마주하면서 늑대와 함께 몽골의 조상을 이룬 흰 사슴이 사라져 버린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슴은 건강과 장수, 혹은 아름다움이나 순수한 자연의 생명력이라는 이미지를 가진다. <몽골비사>가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기록한 서사시라고는 하지만 중세 몽골 여성들의 목소리도 못지 않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지배계층이 아닌 약탈의 대상이 된 이들의 목소리도 묻어 있다.
먼저 눈에 띄는 몽골의 흰 사슴은 칭기스칸의 여계 조상 중에도 미인으로 유명했던 ‘알란’이다. 그이는 아들 둘을 낳고 전장에서 남편을 잃었지만 곧 또 다른 아들들을 셋이나 낳는다. 그녀는 노란색을 띄는 사람이 밤마다 빛으로 변해 찾아와 그의 아이를 낳은 것이라고 말하며 먼저 낳은 두 명의 아들을 포함 다섯을 키워 씨족을 이룬다. 알란의 임신은 빛, 태양을 숭배하는 문화의 영향으로 보이고 고구려 주몽신화와도 유사하다. 알란은 당당하게 아들들이 모두 하늘의 자식으로 모든 자들의 임금이 될 것이라 했다. 알란은 혹독한 상황에서도 아들들을 기르며 강인하게 살아남는 전형적인 중세여성의 상을 보여준다. 다만 이처럼 초기 몽골 부족들에서는 여성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도 그것이 그리 큰 흠이 되지는 않는 풍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약탈혼이 비일비재했던 초원의 상황과도 맞물린다. 정주민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한 초원의 삶에서 가장 부족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 특히 여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는 사회 존속의 중요한 요소인데, 생존을 위한 약탈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유목민의 삶에서 씨족의 인구수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척도였다. 큰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자신의 씨족수를 불려줄 여성들을 많이 거느렸다. 그러다보니 여자는 늘 부족했고 작은 씨족의 남자들은 목숨을 걸고 여자를 쟁취해야 했다. 칭기스칸의 어머니 후엘룬도 약탈을 통해 데려온 여자였다. 후엘룬은 이미 결혼하여 남편이 있었지만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한치의 주저없이 그녀를 납치했다. 후엘룬은 강제로 끌려오며
오난 강이 물결치도록
숲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울었으나 힘이 약했던 남편은 도망치고 말았다. 그 후 후엘룬이 칭기즈칸을 낳았을 때 아기의 손에는 검은 핏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피로 얼룩진 정복전의 우두머리가 될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반면 딸들은 아들들과 달리 ‘백성과 나라를 다투지 않는’ 안전한 존재로 여겨졌다. 딸들은 여차하면 권력자를 위해 바쳐야 할 예비 자원이었다. 몽골의 흰 사슴은 부족의 번영을 위해 바쳐지는 미의 화신이었다.
손녀의 예쁜 얼굴
미모의 딸을 가진 사람들
볼이 고운 딸들을
그대들의 칸이 된 이를 위해
큰 수레에 태워
검은 수낙타를 매어 달려가게 해서
카톤(귀부인)의 자리에 함께 앉힙니다.
칭기즈칸 역시 자신의 첫 아내를 약탈당한다. 어머니 후엘룬이 속해 있던 메르키드 부족에게 보복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독살당하고 무력이 없는 가족은 초원에 그대로 버려졌다. 부족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은 죽는 것보다 못한 고통과 멸시를 당해야 했다. 어머니 후엘룬은 다섯 아이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고 산열매를 따 먹으며 굶주림과 싸웠다. 장남 칭기즈칸 역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맞았지만 어린 나이에 정혼했던 신부 부르테를 찾아 오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부르테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귀한 검은 담비코트를 당시의 권력자 옹칸에게 바치고 후원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부르테가 납치당하면서 그것을 명분삼아 군사를 모으기 시작한다. 아내를 찾아온다는 대의명분에 풍족한 부족을 약탈한다는 현실적 목적이 겹치며 칭기스칸의 군대는 몸집을 불렸다. 결국 칭기스칸은 원수 메르키드족을 공격하여 처절하게 약탈함으로써 아내도 찾고 함께 싸운 이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칭기즈칸은 한때 “그림자 말고는 동무도 없고/ 꼬리말고는 채찍도 없는” 극도의 고립되고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나 초원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칭기스칸이 초원의 제왕이 되는 과정에서 후엘룬은 전장에서 버려진 고아들을 길러 아들을 위한 친위대로 삼으며 위대한 어머니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칸의 권력이 커지며 형제들간에 다툼이 생겼을 때 후엘룬은 장남 칭기즈칸과 대립한다. 칸이 막내 카사르의 반역을 의심하여 처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엘룬은 밤새 수레를 타고 칭기즈칸에게로 달려와 윗옷을 벗고 대칸이라도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랐음을 보였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끝내 후엘룬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 몰래 동생을 살해한다. 게다가 그는 원정도중 열병에 걸려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가까운 친척을 희생하라는 무당들의 조언을 듣고 또다른 동생 톨루이를 제물로 삼는다. 칭기즈칸은 이미 곤궁하던 시절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가로챘다고 배다른 동생을 쏘아 죽인 일이 있었다. 후엘룬은 위대한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그것은 수사에 불과할 뿐, 비극적으로 자식들을 잃고 말았다.
한편 납치된 후 구출된 칭기즈칸의 첫 번째 정실 부르테는 대카툰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구출되었을 당시 임신 중이었다는 점은 ‘알란 미인’의 시절과 달리 약점이 되었다. 첫 아들 주치는 종종 칸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았고, 권력 승계과정에서 노골적으로 그 점이 들춰지곤 했다. 그리고 칸은 끊임없이 여자들을 들였다. 때로는 자매가 함께 칸의 여자가 되기도 하고 남편이 있는 여자도 칸에게 바쳐졌다. 여자들은 전투마에 비유되며 칸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렇게 칸의 여자는 수십에서 수 백 명까지 늘어났지만 부르테는 대카툰의 자리를 잘 지켜내며 그녀의 아들들이 모두 칸의 영지를 물려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몽골에서는 부르테가 매우 지혜롭고 현명하여 칸에게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부르테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몽골비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는
이와 같은 표현은 오직 칭기즈칸, 테무진이 태어났을 때에만 사용되었다.
후엘룬이나 부르테처럼 위대한 여인이라는 칭호를 받는 이들과 다른 또 다른 존재들이 <몽골 비사>의 행간에 숨어 있다. 정복지에서 데려온 여자들은 물건이고 재산이었다. 칭기스칸에게 대항하다 절멸된 자카 감보 부족의 두 딸은 모두 칭기스칸이 취했는데, 이중 큰 딸 이바카 베키는 후에 칸의 오른팔인 주르체데이 장군에게 상으로 보내졌다. 코르치라는 칸의 또 다른 부하는 승전의 공으로 약탈지의 처녀 30명을 상으로 받았다. <몽골비사>의 전사들은 노래한다.
천장 위로 들어가
대문을 들부수고
그의 처자가
끝장이 나도록 약탈하자
품을 만한 것들은
품어 자기 여자로 만들자
빗장 걸린 집을 부수고
우아한 여자들을 붙들어
긴 것의 끝까지
깊은 것의 바닥까지
자신들이 유린한 부족의 여자들을 취하는 것은 적에 대한 완전한 정복을 뜻했다. 항복한 적의 딸과 아내를 데려와 노예로 삼거나 임신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몽골비사>의 행간에는 여자들의 비명과 저주와 이를 악문 인고의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현대 몽골은?
1924년, 몽골의 마지막 왕 복드칸이 사망했다.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 가 되었음에도 왕이 존재한다는 기괴한 형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새 왕비가 된 지 1년 남짓 한 젊은 왕후 게네필이 문제였다. ‘몽골의 스탈린’으로 불리던 권력자 처이발상에게 그녀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봉건의 폐기물이었다. 전근대성의 상징인 된 ‘유목’처럼. 아무런 실권도 없던 왕후는 궁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곧 적국(일본)의 스파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죄목을 얻어 임신 5개월의 몸으로 총살당했다. 왕인 복드칸이 마지막까지 존중받았던 것과는 판이한 결과였다. 이러한 마지막 황후의 비극이 전설적 텍스트 <몽골비사>속의 여러 여인들과 연결된다. 그럼 이제 현대의 몽골에서는 여인들의 잔혹사가 끝났을까.
몽골의 마지막 황후로 추정되는 게네필의 모습. <스타워즈>의 아미달라 여왕 이미지에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몽골인민공화국은 다른 사회주의권 국가들처럼 체제의 붕괴에 직면했다. 엘백도르지가 이끄는 민주동맹이 울란바토르 광장에서 시위와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전국 각지에서 호응하는 이들이 광장으로 모였다. 그들의 손에는 칭기즈칸의 이름이 쓰여진 깃발이 휘날렸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인민혁명당은 한때 계엄령을 고려했지만 결국 계엄을 내리지는 않았다. 몽골은 사회주의 국가들 중 드물게 무혈 민주혁명에 성공했다. 민주주의 쟁취 이후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의 해방이었다. 공산 정권 내낸 소련의 위성국으로 살았던 몽골에서 칭기즈칸은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입에 올리기도 힘든 존재였다. 몽골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칭기즈칸의 전설은 민주화와 더불어 부활했다. 거대한 칸의 동상이 광장에 세워지고 전국 곳곳에 칸을 위한 기마상과 기념비들이 세워졌다. 몽골이 유목의 전통에서 멀어질수록 칸의 이름은 더욱 높은 곳에서 빛난다. 무력에 의한 정복왕조를 세웠던 몽골이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새국가가 된 것은 다소 아니러니하다. 이제는 칭기즈칸의 휘황찬란한 업적 뒤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까지 짚어내야 하지 않을까. 인류에게는 평화라는 영원한 과제가 있으니 말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몽골비사>가 가지는 의미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