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TORY 14<삼국유사>파먹기(3)

신물 (1) 유리구슬의 비밀

by 타이미르

사진: 경주 황남대총 출토 유리구슬 (출처:구글)


삼국통일 후 100여년이 지난 원성왕대. 묘정이라는 사미(沙彌-7~20세 미만의 젊은 스님)가 있었다. 어느날 궁안에서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 단을 세워 큰 스님의 강론을 듣는 일)이 오래 행해졌는데, 묘정은 그때 궁에 들어왔다. 그는 궁안의 금광정이라는 우물에서 늘 밥을 먹은 그릇(바리때)를 씼었다. 금광정은 왕실이 기우제를 지내면 물이 넘치던 성스러운 곳이다. 그곳에 자라 한 마리가 있어 우물속에서 떴다가 가라앉곤 했다. 묘정은 매번 그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고 함께 장난을 치기도 했다. 야단법석이 끝날 무렵, 묘정은 자라에게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지 오래인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느냐"고 물었다. 며칠 후 자라는 입에서 조그만 구슬 한 개를 토해 냈다. 묘정은 그 구슬을 허리끈 끝에 매달았는데, 그후 왕이 그를 사랑하여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고관대작도 묘정을 아껴 그를 데리고 황제를 알현했다. 당나라 황제도 묘정을 사랑했고 승상 및 좌우 신하 누구든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런데 한 관상 보는 이가 묘정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 '한 군데도 길한 상이 없는데 왜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까.' 그래서 틀림없이 신이한 물건을 가졌으리라 짐작, 묘정의 몸을 뒤졌다. 허리끈에 매달린 구슬이 나왔다. 구슬은 당나라 황제가 잃어버린 구슬이었다. 황제는 전부터 네 개의 여의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날이 바로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이었다. 황제는 구슬을 빼앗은 후 묘정을 신라로 돌려 보냈다. 그 뒤로 묘정을 사랑하거나 신뢰하거나 존경하는 이는 없었다.

-<삼국유사> '기이(奇異)' 권2 원성대왕'조(條) 발



내 인생을 구원해줄 나만의 보물. 모두가 한 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브리튼의 시골에서 눈칫밥을 먹던 젊은 아서는 엑스칼리버를 뽑아 고귀한 혈통을 인증받았고 <왕좌의 게임> 대너리스는 용의 알을 부화시켜 여왕이 되었다. 소위 '힘숨찐'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주인공은 자신을 억압했던 이들을 참교육 한다. 아드레날린을 북돋는 이야기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신물들은 원래 주인이 정해져 있다. 숨겨진 왕족이거나 폐위된 왕족이거나. 아무튼 진짜 주인이 아니면 아무 위력이 없다. 평소 로열 블러드니 혈통이니 하는 것들엔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필자에겐 좀 아쉬운 점이다. 묘정이 가지게 된 구슬은 이와 달리 딱히 주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든 힘을 빌려준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 반지나 영화 <와호장룡>의 청명검처럼, 묘정의 구슬은 그것을 가진 이를 즉각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묘정의 구슬 이야기는 '원성대왕'이야기에 곁들이처럼 붙어 있지만 한 줄 한 줄을 씹어 보면 볼수록 예상치 못한 맛이 난다. 먼저, 주인공은 젊은 스님인데, 이 친구는 꽤나 욕망이 있는 사람이다. 궁정의 야단법석에 참석하여 하필 신성하다 알려진 장소에서 늘 자신의 바리때를 씻었다고 하지 않는가. 바리때는 스님들에게 주어진 밥그릇과 수저 등 먹거리 도구인데, 이건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큰 스님이 자신의 후계자에게 바리때를 전수한다. 즉 스님의 수행력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인 셈이다. 게다가 묘정은 자신이 밥을 준 자라에게 보은을 요구하고 자라가 토해낸 구슬을 몸에 지니며 그로 인해 혜택을 누린다. 바로 사랑과 신뢰, 존경이다.


자라가 우물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는 문장도 흥미롭다. 예부터 육지와 물을 오가는 생물은 영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거북이류는 물론이고 메기나 가물치, 때로는 개구리가 그렇다. 자라는 남성의 성기처럼 생긴 목 때문에 양기 보완에 특히 좋다고 해서 보양식으로도 널리 사랑받았다. 여기에 성스러운 우물이 더해진다. 우물은 여성의 자궁, 즉 생명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며 인간의 깊은 무의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때로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가 될 때도 있다. 이렇게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신성한 곳에서 묘정은 빛나는 구슬을 얻는다.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논할 때 걸핏하면 소환되는 중국 역사서인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삼한인들이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금과 은, 비단도 보물이지만 구슬을 더 값지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리고 이 기록은 팩트인 것 같다. 천연 유리는 빛나는 보물로 보석으로 여겨졌고 경주의 왕릉에서도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묘정이 얻은 신비의 구슬도 이런 천연 유리 구슬이라 유추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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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잔. 신라의 신비를 상징하는 유물 중 하나이다. (사진 출처:구글)


천연 유리는 대지의 심장이 터져 나오는 화산의 폭발이나, 하늘의 분노인 번개가 모래를 내리칠 때 비로소 잉태된다. 규소가 섭씨 수천 도의 열을 견뎌내며 투명한 보석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맞물린 신령한 사건이었다.이런 유리를 갈고 다듬어 구슬을 만든다.


구슬의 둥근 모양은 그 자체로 '결점 없는 완벽함'을 뜻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굴러가 버릴 준비가 된 '불안정성'을 품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매끄럽게 연결된 원의 곡선은 돌고 도는 인생사와 시간의 순환을 말하기도 한다. 묘정은 그 완벽한 구를 허리띠에 묶어두며 자신의 행운도 영원히 곁에 머물 거라 믿었을 것이다. 젊디 젊은 스님은 자신에게 찾아온 운을 즐긴다. 그러나 구슬은 또한 인간의 눈을 닮았다. 묘정의 행운을 유심히 지켜보는 타인의 눈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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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국립 박물관의 유리 구슬 유물들. 가슴드리개와 장신구에 곡옥이 어우러진다.


묘정이 당나라에 가서 알게 된 구슬의 정체는 여의주였다. 여의주는 용이나 마갈어(摩竭魚-인도 신화의 신성한 물고기)같은 신령한 동물에게서 나왔다고도 하며 부처의 사리가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요상한 물건은 소원성취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때론 병이나 재난을 피하게도 한다. 그런데 이 엄청난 보물을 당나라 황제는 무려 네 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나라 황제의 권력은 그 자신의 힘과 능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구슬의 힘에서 나오는 것인가. 묘정의 이야기에서, 아니 다른 모든 신물의 이야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인간일까 신물일까.


황제가 묘정을 죽이지 않고 쫓아 보내기만 한 것도 눈에 띈다. 황제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한여름 모기를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 감히 황제의 구슬을 가졌던 이를 (물론 황제의 것임을 몰랐다 해도) 쉽게 살려 보내다니. 자신의 비밀이 들통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황제가 특별히 선해서라기 보다는 구슬의 힘으로 황제의 자비심이 발동되었을 것이라 필자는 추측해 본다. 아무튼 묘정이 누렸던 사랑과 신뢰, 존경이라는 보물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책을 덮고 나서 이야기가 남긴 여운을 더 음미해 보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다른 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옛 교훈이 떠오르기도 하고 권력과 욕망의 허망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굳이 '주제'라는 이름하에 이야기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인간의 욕망은 시공을 초월해 비슷하다는 점에 무릎을 치며 지루한 업무시간, 몰래 즐거운 공상에 빠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얼마 전 경주에 갔을 때, 박물관에서 보았던 유리구슬들이 떠올랐다. 신라의 유물들은 아주 먼 곳, 중앙 아시아나 로마 같은 곳에서 초원 길이나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왔다는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신비로운 구슬이 위의 원성왕대보다 무려 500년전,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인면 유리구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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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미추왕릉에서 나온 목걸이. 밑에서 세 번째 유리구슬이 인면 유리구슬이다. (왼쪽 확대사진) 출처-구글


10여년 전, 영국의 고고학자 랭턴 박사라는 분이 KBS다큐에 출연하여 이 구슬의 연원을 찾아갔다. 유리공예가 발달했던 이스라엘과 로마를 거쳐 그가 마침내 발견한 인면 유리구슬의 본원지는 놀랍게도 인도네시아 자바였다. 바다를 건너 왕의 목걸이를 장식했던 구슬이 돌고 돌아 황제와 묘정의 손을 거쳐 지금은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묘정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소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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