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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미르 Aug 06. 2023

THE GREAT STORY

아시아의 신화와 전설 이야기


 50에 다시 만난 신화


약 25년 전쯤 일이다.  나는 신화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사학과에서 국문과로 전공을 바꾸었는데, 그때 접한 낯설고도 신비로운 무속신화들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국문과 수업을 청강하러 들어간 자리에서 당금애기와 바리공주 그리고 제주도 신화를 접하며,  나는 내가 전혀 모르던 낯설고 기이한 세계에서 오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들은 아름답고 체계적이며 행복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뒤가 맞지 않고 거칠었으며 종종 선과 악을 구별하기도 어려운 이상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신화와 전설엔 무엇인가 원초적인 것이 있었다. 가식과 위선의 탈을 벗고 맨몸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이야기. 신화를 접한 경험은 막연히 현대소설을 전공하려 했던 계획을 완전히 때려 엎는 충격이었다. 


안 그래도 노처녀가 되어가는 딸의 진학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이야기들에 질겁을 했다. 엄마는 아주 성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나름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결혼 전까지 교회를 다녔고 노후에 다시 신앙을 회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무속신화를 연구한다고 굿을 보러 다니고 무당들과 인터뷰를 하는 나는 완전히 비정상이었고 저러다 잘못해서 신이라도 내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당혹스런 걱정까지 해야 했다. 읽는 책들을 봐도 그랬다. 걸핏하면 처녀가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 알을 낳던가 일곱 마리 뱀새끼를 낳는 둥 해괴망측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학기말 보고서를 쓸 때쯤이면 채록해 온 굿판의 음악들이 방밖까지 새어 나오곤 했으니 엄마가 입버릇처럼 "왜 하필이면 그따위 것을 공부하냐"라고 한탄하며 몸서리를 칠 만도 했다. 그러나 정작 신화공부에 대한 나의 꿈은 점점 더 부풀어가고 있었으니, 그것은 언젠가 아시아의 신화들을 연구하여 대중화하겠다는 엄청난 꿈(이라 쓰고 망상이라 읽는다)이었다. 신화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왜 우리는 어릴 때 그리스-로마 신화만 읽고 우리 신화나 아시아 신화에는 무지한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 아시아 초원과 사막 어딘가에 있는 부리야트족, 야쿠트족, 흉노와 돌궐의 무덤을 찾아가고  그 깊고 푸르다는 바이칼 호수와 이식쿨 호수를 찾는 꿈. 생각만 해도 신나는 꿈이었다. 


    양평 지노귀굿에서 연행되는 바리공주 무가. 무당이 바리공주로 분한다. 


그러나 그 후로 몇 년 뒤, 나의 그 원대한 꿈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으며 부모님들은 병환으로 한 분 두 분 쓰러졌다.  가방끈은 길지만 거의 빈민 생활이나 다름없었던 대학원생의 삶에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공부를 접고 생계에 뛰어들며 딱 5년만 돈을 열심히 벌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자... 그렇게  다짐했지만 그건 생계의 무서움을 모르던 철없는 시절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5년은 25년이 되었고 나는 점점 이야기에서 멀어지며 놀랍게도 50이라는 숫자를 맞이했다. 


내가 자영업자로 정신없이 생활하는 동안 신화와 전설은 놀라운 변신을 하며 새롭게 태어났다.  인터넷과 영상문화의 발달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가장 많은 각광을 받은 문학분야는 아마도 신화가 아닐까 싶다.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라 절대 영화화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반지의 제왕>은 매년 한 편씩 3부작이 제작되는 기막힌 방식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타냈다. 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신들과 영웅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각종 게임과 드라마에도 신화적 소재들이 넘쳐난다. 우리 엄마를 가슴 졸이게 했던 무속신들의 이야기는 <신과 함께>라는 웹툰을 거쳐 영화로도 대박을 쳤다.  '신화의 힘'이 새로운 문화환경에서 강력함을 입증한 사건들이었다. 나는 그런 변화의 흐름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좌절감에 젖기도 했다. 내가 신화와 전설에서 멀어진 사이, 생활의 불안과 가난을 견디며 이야기를 쫓아간 수많은 창작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서 내가 설자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바리공주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쓴 소설. 여기서는 바리데기가 죽음을 가져오는 존재로 설정되었다.


그런 와중에, 신화를 다시 만난 것은 올해 초부터이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인생의 위기를 확연히 느끼는 해였다. 코로나 19는 끝났지만 그때 입은 타격이 그대로 생활로 이어져, 함께 학원을 운영하던 나와 남편은 줄어드는 매출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는 아직 대학입학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에 대한 부양도 계속해야 했다. 우리들의 노후대비도 걱정스러운 마당에  나의 갱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체력 저하와 과체중, 시도 때도 없이 온몸에 열감과 가슴 두근거림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자주 했다. 이전에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각종 사건 사고가 다 나의 일이 될 것 같았고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불면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신화는 그때 다시 찾아왔다. 내 삶은 그저 그런 채로 여기서 끝날 거라는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  영화도 미국 드라마도 재미가 없어지고 유튜브도 시큰둥해지고 친구와의 수다에 허무감을 느낄 때. 그런 때 손에 잡히는 것은 책장 한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오래된 이야기들이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삼국유사>, <삼국사기> <몽골비사> 같은 것들. 화려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한 영상들보다 활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책들에서, 나는 오랜만에 나만의 상상력이 마음껏 펼쳐지는 자유를 느꼈다. 

몽골 초원에 세워진 '오보'. 몽골계 유목민들의 신앙대상인 하늘신 탱그리에게 소원을 비는 곳이다. 


'잃어버렸던 꿈을 찾는다'라는 말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의 꿈이 지금의 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인 양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을 잃었다'면 잃을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생계를 챙겼던 지난 25년의 세월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자영업자로, 맞벌이 부부로, 엄마로 살아왔던 시간 속에서 겪었던 많은 경험들이 신화와 전설 속에 숨겨진 옛 지혜를 만나 더 깊게 탐색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혈기왕성했던 시절 선택했던 이야기들이 중년의 삶에선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것이 어쩌면 100세 시대 내가 제2의 인생을 여는 기폭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기묘한 이야기, 파도 파도 새로운 의미가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생한 의미를 찾으러 이제 오랜만에 이야기의 세상 속으로 모험을 떠난다. 자,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밤, 남몰래 눈을 감고 신묘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이 뛰노는 곳. 독수리와 매를 타고 날아갈 수 있는 곳. 검은 아무르 강과 대흥안령 산맥의 어느 곳에 새롭게 태어난 내가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고 인생의 고난을 헤쳐나갈 것이다. 삶은 이제 진정한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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