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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17. 2023

30만 원

30만 원. 누군가에겐 서로 빌려놓고 갚지 않아 관계가 파탄 나는 이유가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 페이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양이기도 하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한 달 생활비이지만, 부유한 이들에게는 때로는 쓰는 데 단 몇 초의 망설임조차 요구하지 않는 액수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30만 원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돈만큼 같은 양이라도 다른 가치를 매기는 건 없다.


나에게 30만 원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액수로만 치면 내가 요즘 갖고 싶은 커즈와일 KA50 디지털 피아노를, 나이키 티엠포 최상급 축구화를 살 수 있는 돈이지만, 내가 첫 번째 글을 쓴 날 아빠가 준 30만 원은 내 인생을 위한 마중물이었다.


입대하기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날 보겠다고 모처럼 아빠가 집에 왔다. 코로나 시국이 시국인지라 정말 오랜만에 만났지만, 정작 새 차 보러 갈 때 빼고는 같이 밖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어김없이 흘러 어느덧 다시 돌아갈 날이 왔는데(돌아간다는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아빠는 내 삶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나 보다), 냉장고 정리하는 문제와 기타 집안일 가지고 자꾸 잔소리하던 게 화근이 돼 엄마가 폭발해 버렸다. 원래는 늘 했던 대로 공항까지 바래다줘야 했지만,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아 결국 아빠 혼자 쓸쓸히 공항으로 가게 됐다.


그래도 다시 떠나는 아빠에 대한 최소한의 정성으로, 나라도 같이 짐을 택시까지 날라다 주었고, 트렁크에 짐을 다 싣고 난 후,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지갑에 있는 남은 현금(5만 원권 6장)을 모두 꺼내 나에게 건넸다. 감동적인 말 따위는 없었고, 그저 군대 잘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아빠는 다시 내 삶에서 사라졌다.


아빠가 가고 난 후, 침대에 누워 30만 원을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옷을 사도 못 입으니까 의미 없고, 마땅히 사고 싶은 건 없는데,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아니 지금 난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수많은 부정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우울해졌다.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 왜 나는 이따구로 밖에 못 사는 거지? 엄마는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속 좁게 행동한 거야? 우리 가족 도대체 왜 이래? 어디서부터 망가진 거지 내 인생. 앞으로 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야?’ 쏟아지는 회의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난 울고 말았다.


정말 오랜만에 울었다. 그냥 너무 슬퍼서, 이 상황이 감당이 안 돼서 한순간 내 감정을 쏟아내 버렸다. 눈물의 이유는 뭐라고 특정하기 힘들다. 내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한풀이였던 건가, 혹은 그동안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을 내 인생에 대한 후회? 아니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나와 주변 요소, 뒤처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 아니면 그 모든 게 합쳐져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건가?


하지만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울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 때와 달리 이젠 어른이 돼야만 했으니까. 내 문제를 누군가에게 떠넘기거나 하소연함으로써 뒤로 물러날 공간이 더 이상 나에게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옆방에 있는 엄마가 듣지 못하게 최대한 숨죽여 울었다. 아이는 소리 내서 운다. 그래야 어른들이 듣고,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까. 그러나 어른은 소리 내 울 수 없다. 세상은 엉엉 우는 어른의 투정을 받아주지 않는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내 감정을 전부 그 공간 안에서 쏟아냈다.


어느 정도 울고 나니 진정이 됐던 걸까,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앉아 여러 생각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내 상황이라면 아빠는 어떻게 했을까. 그러고 보니 난 아빠의 삶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어찌 알 도리가 전혀 없었다. 이야기를 듣자니 너무 모호하고 왜곡되어 있을 테고, 글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책 같은 수단을 통해 부모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나라도 한 번 써보자.'


'내 자식이 나랑 비슷한 나이가 됐을 때, 특히 방황할 때 같은 시기의 부모의 이야기를 한 번쯤 읽을 수 있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 이번만큼은 미루기 싫어 곧장 책상에 앉아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예외 없이 쓴다는 원칙하에 매일 쓰다 보니 오늘, 544까지 왔다. 30만 원짜리 동기부여가 자신과의 약속이 됐고, 그게 오늘까지 왔다.


1년에 5천만 원씩 내고 다닌 학교에서도 만들지 못한 내면의 변화를 고작 30만 원이 만들어 냈다. 과제 좀 데드라인 맞춰서 내라는 교수의 핀잔, 공부 좀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 앞서 나가는 친구들과 비교할 때 느낀 열등감,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행동하지 않을 때 느낀 모순적 불안감도 바꾸지 못했던 나를 바꿔보겠다는 다짐을 고작 30만 원 받고 했다.


내 미래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만약 내가 30억, 혹은 그 이상을 버는 사람이 되어 30만 원 정도는 우스운 돈이 되더라도, 그 돈을 절대 무시하지 못할 거다. 쓸데없어 보여 사치품 하나 사면 사라질 30만 원이라는 액수의 돈이 가진 잠재력을, 지금 내 삶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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