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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17. 2023

삶과 죽음의 공존

수원화성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

모순된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예전부터 생각하고는 했다. 선하면서도 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싫어할 수 있을까 등의 하나로 특정 지을 수 없는 모호한 수많은 질문들에 의해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우리의 삶에서 일종의 대안을 제시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세상은 이분법을 좋아해서 우린 자주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는데, 때론 도저히 하나를 고를 수가 없는(후라이드와 양념, 엄마와 아빠 등) 상황이 있기도 하고, 두 가지 경우가 한데 섞여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그 후자의 경우를 본 신기한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수원 화성에 갔다. 화서문에서 출발해 장안문까지 걷다가, 성 안 솥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화성행궁에 갔다. 경복궁에 비해 규모가 확연히 작다는 게 느껴졌는데, 그 작은 건물의 구조마저도 제대로 알지 못해 둘러보면서 그저 “와 크다”, “신기하다” 등의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나와 달리 나름 한옥의 구조에 대한 조예가 있어 여러 장치들의 기능을 잘 아는 친구가 내심 부러웠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좁다는 건 그만큼 아는 게 없다는 걸 드러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타 문화유적처럼 화성행궁에도 고목이 여럿 있는데, 이곳의 나무들은 특이하게도 반은 죽어있고, 반은 살아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과거에 화재에 일부가 탔지만, 나무 회복 사업의 일환으로 나머지는 살려서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됐다고 쓰여있던 걸로 기억한다. 600년 된 오래된 느티나무도 그랬고, 내가 사진을 찍은 나무 역시 반은 죽어서 껍질이 벗겨져 있었고, 반은 겨울이라 이파리가 없던 걸 제외하면 평범한 나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게 무슨 종인지 안다면 나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쓸 수 있을 텐데, 요즘 글 쓰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무의 종류를 잘 몰라 풍경을 묘사하는데 미묘한 부족함이 생기는 거다(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나무를 무슨 상태라고 정의해야 할까? 반은 죽었으니 죽었다? 아니 그래도 살아있는 부위가 있으니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살아있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음을 안고 있는 삶이라고 해야겠다. 죽음과 삶이라는 0과 1의 이진법의 세상을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묘하게만 느껴지는 상황이다. 삶에 더 가까우니 중간에서 좀 더 떨어진 0.6, 0.7 정도라고 해야겠다. 분명 저건 1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니까.


나무는 죽음을 안고 산다. 살아있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비교해 뭔가 우월해 보여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두 가지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저 아이러니, 나무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삶과 죽음조차 양립시키는 나무와 달리, 우리는 스스로의 논리체계에 갇혀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두 갈래로 나누고 그 사이를 오가지 못하게 경계를 막아놨던가. 여성과 남성, 우등생과 열등생, 주인과 노예 등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인간이 양립할 수 없는 삶과 죽음조차 양립시키는 나무를 통해 배울 점이 많다고 느낀다. 


논리적 모순을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걸 가능하게 하는 조화의 공간, 나무. 비록 반은 죽어 말라비틀어져, 화성행궁이 아닌 다른 공간이었다면 흉측하다고 느낄 법한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그 흉측함에 나무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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