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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17. 2023

4천 원짜리 양심

휴게소에서 산 식혜를 마시면서 드는 생각

4천 원 가지고 한 사람의 양심과 도덕성을 판단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액수에 따라 그 사람이 유혹에 흔들리는 정도는 달라질 거다. 그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액수였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모른 체하면서 떠났을까. 나의 양심은 과연 얼마짜리일까? 우선 오늘 일로 4천 원보다는 높다는 건 확실해졌다.


휴가 복귀하는 버스, 출발하자마자 실컷 유튜브를 보니 멀미가 나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 눈을 감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3분의 2 정도 됐을 때 휴게소에 도착해서야 눈을 떴다. 잠든 1시간 좀 넘는 시간 동안 뉴진스의 OMG를 들으면서 이어폰을 꽂고 있어 가지고 왼쪽 귓속이 부어올라 먹먹함이 느껴질 정도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원통을 오가는 버스를 탈 때 휴게소에 들른 적이 없는데(운행 시간이 짧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밖에 나가려고 이것저것 갖춰 입는 게 귀찮다), 어제부터 가뜩이나 목이 부어 아픈 와중에 입을 벌리고 자서 갈증까지 심해져 목이 갈라지는 느낌이 심해 목을 축이려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면서 다시 탈 때 다른 버스와 혼동하지 말라는 차내 방송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주차장에는 버스는커녕 승용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차가 없어 트인 시야에 매점 메뉴판이, 특히 그중에서 유일한 마실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식혜 4000원”

좀 비싼 가격이었다. 아무리 요즘 고물가라고 하더라도 식혜 500ml 페트병 하나에 4천 원이라니. 정말 내가 군대에 있느라 물가에 대한 감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는 건가? 건물 안에 편의점이 있는 게 유리문 너머로 보였는데, 워낙 마실 게 급했는지 곧장 삼성페이를 켜고 식혜를 샀다. 워낙 목이 말라 급한 와중에도 밑에 고인 쌀을 섞기 위해 식혜가 담긴 병을 한 번 흔들어준 후 한 모금 들이켜는데, 순간 엄마가 오늘 터미널에 내려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들 우리은행 카드 잔액 다 쥐어짜 냈더라? 용돈 좀 필요해?”


평소에 쓰지 않던 LCK 체크카드를 이번 휴가 때 몇 번 쓰다 보니 얼마 남아있지 않던 잔액마저 거의 소진됐고, 결국 어제 친구랑 간 수내역 한스에서 먹은 고구마 케이크에 6,500원을 쓰고 나니 겨우 150원이 남았다. 하필이면 고등학교 때 내 계좌의 전화번호를 엄마 거로 해놔서 돈을 쓸 때마다 알림 문자가 와서 잔액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휴가 때 반드시 은행에 가서 내 번호로 바꿔두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게 그다지 간절하지 않았던 건지 귀찮음에 미루고 미루다 결국 가지 않았다. 또 귀찮음에 해야 할 일을 또 미뤘다는 생각에 자책하고 있었는데, 순간 문자 알림이 왔다.


지인들과는 대부분 카톡이나 DM으로만 소통하기에, 문자가 왔다는 건 소비자, 고객으로서의 나에게 어떤 볼일이 생긴 거였다. 방금까지 한 생각 때문에 단번에 내가 잔액이 없는 카드로 결제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문자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였다. 


“잔액 부족으로 인해 결제가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어?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왜 잔액 부족인 거 몰랐지, 실수한 건가.’ 그 순간 버스 문 앞까지 다 왔겠다 굳이 돈 내러 다시 돌아가기 귀찮고, 어차피 4천 원이라는 작은 돈 굳은 셈 칠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곧장 매점으로 가 상황을 이야기하고 다른 카드로 식혜 값을 냈다. 그때 반응을 보아하니 아주머니는 잔액 부족으로 결제가 안 됐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게 내 선택으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일을 했다. 그리고 적은 금액이지만 손해를 봤다.

어차피 큰 액수는 아니었기에 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뭔가 미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착한 일을 하면 보상이 따라올 거라는 믿음이 있는데 그러지 않아서? 사실 내 행동은 당연했다. 그게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개인 간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가장 작은 단위에서의 최선의 행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양심적인 선택 자체에 불편함을 느꼈다. 착하고,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워왔고, 방금 나름대로 배운 걸 실천으로 옮겼는데,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다.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떤 논리와 지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착한 행동을 하고 불편함을 느낀다는 건 사실 내가 착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반증인가? 나는 어떤 근거로 그 행동을 당연하다고 여겼을까. 법? 양심? 그 근원을 생각해 보다가 일종의 인지부조화가 온 자신을 발견한다.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손해 보면서 살기는 싫은데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 모순적 구조에 불만을 제기하면,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보상이 돌아온다는 인과응보식 논리가, 정말 그렇게 살아온 건지 의심되는 꼰대들의 입에서 나온다. 4천 원짜리 양심이 나를 그토록 불편하게 만든 이유는, 지난 15개월, 아니 어쩌면 더 긴 시간 동안 모순 속에서 살아오다가 인지부조화에 빠진 나에 대한 자기 연민을 느끼게 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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