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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Feb 03. 2023

옷의 기억

보풀이 일어난 방상외피(야전상의)를 보다가 떠오른 엄마 생각


일과가 끝나고, 다음 주 훈련에 대비해 미리 전투복을 세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래도 훈련 때는 야전상의 대신 스키파카를 입을 테니 굳이 일주일도 안 돼서 또 세탁하긴 그래서 다시 옷장에 걸어두려던 찰나, 지퍼 쪽에 생긴 보풀을 발견했다. 이 옷도 1년 넘게 거의 매일 입다 보니 여러 군데 해졌네. 전역하고 나면 버려야 하나? 아니지 나중에 예비군 가야 할 거 생각하면 가지고 있긴 해야겠다. 군 생활이 막연하게 추억이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추억 보존도 될 테니. '생각해 보니 옷장에 있는 옛날 옷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야전 상의처럼, 옷장 안 옛날 옷 하나하나에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만의 기억이 담겨있다.


"엄마 이제 옷장 공간도 부족한데 슬슬 옛날 옷 좀 버리면 안 돼?"


"아니, 그런 거 함부로 버리지 마. 특히 교복 이런 건 버리지 말고. 생각 없이 버리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엄마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버리지 않은 옷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새 옷이랑 뒤섞인 바람에 찾기도 힘들고, 평소에 정리하기도 쉽지 않아 막상 옷을 사놓고 잘 입지 않게 된 경우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옷에 관심이 생겨 여러 벌 사자, 마음먹고 옷장에 있던 것들 중 절반 넘게 버린 적도 있다. 그래도 반팔티나 셔츠와 달리, 여전히 아우터나 교복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옷걸이를 걸어놓을 공간이 부족해 차라리 헌 옷을 어디 박스 같은 곳에 모아서 보관해 둘까 생각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때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행동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언젠가 떠나갈, 아니 이미 떠났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기억을 옷장 안에 담아두고 싶었던 거다.


가족모임 때 모처럼 만난 친척들이 나에게 대학도 잘 갔고, 군대까지 갔다 오니 온갖 말썽을 부리는 장난꾸러기였던 그때와 달리 의젓하고 멋있어 보인다고 말했다(사실 의젓해진 건 전혀 모르겠지만). 그러나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말 안 듣긴 해도 그때가 진짜 예뻤다고. 그 말을 듣고 난 후 할아버지 집 벽에 걸려있는 내 돌 사진을 봤는데 다시 보니 진짜 좀 귀여웠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다시 생각해 보니 비록 둘 뿐인 형제지만, 그중 막내인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형에 비해 부모님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게다가 내가 어리광도 더 많이 부렸을뿐더러 요구한 것도 많아 부모님에게 더 애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나를 여전히 어린애 취급한다. 내가 새롭게 도전하겠다고 하는 것마다 기대보단 항상 걱정이 앞서는 걸 보면...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은데 그런 게 계속되다 보면 저절로 위축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사족이 좀 길어졌는데, 어쨌든 이제 엄마에게 난 집을 떠날 사람으로 여겨진다. 미국에 가면 한국에 올 기회가 한 해에 1,2번 정도일 테니 앞으로 엄마의 삶에 내가 차지할 비중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30,40대는 나와 형의 성장기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앞으로 엄마의 삶에는, 그녀가 인생의 거의 절반을 바친 나의 자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기새는 살아남기 위해 어미새를 떠나야만 하니까. 예전에 미국으로 떠나면 엄마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이던 때가 있었는데, 어차피 한국에 살아도 따로 산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어 굳이 인생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둥지를 떠나는 게 두려워 날갯짓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군 입대 이후, 집에 있는 4개의 방들 중에 내 방은 늘 비어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더 이상 새로운 기억도, 추억도 생겨나지 않을 그 공허의 공간에서 내가 해야 하는 건 최대한 방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아이러니하게 그 와중에도 내 흔적은 온전히 남겨놓는 거다. 보드에 붙어있는 중학생 때 받은 수많은 교과우수상 상장과 추억이 담긴 사진들,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던 중,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담긴 문제집과 참고서, 20대 들어 불타오른 앎에 대한 열망을 함께한 다양한 장르의 책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시절의 기억들을 총망라하는 옷장 속 헌 옷까지. 방 안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은 엄마에게 막내아들로서의 나를 키우며 지나왔던 희로애락을 떠올리게 할 거다.


저번 달 휴가 때 고등학교 교복을 보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던 내가 외대부고라는, 나름 유명한 사립고에 입학하자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은 살이 너무 쪄서 전혀 들어가지 않지만. 나는 엄마에게 기쁨과 슬픔,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가져다준 이중적인 존재였다. 나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했고, 그 안에서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내 어린 시절이 엄마에게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해 본다. 그래서, 옷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온 과거가 지나갈 미래보다 길어지는 엄마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옷을 통해 나에게 대한 기억을 잘 보관해 두는 거라고 생각한다. 좀 번거로워도, 떠나고 난 후 내 방이 더 이상 나를 위한 공간은 아니니까 그 정도쯤은 기쁜 마음으로 양보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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