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쓰는 복학생 Mar 18. 2023

한 달

전역 D-30

전역이 정확하게 한 달 남았다. 마냥 전역이 오기만을 기다리기에는 너무나도 길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하면서 충분한 의미를 만들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복학(readmission) 신청이랑 버클리에서의 부동산 계약, 여행 준비 자체만으로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지만, 그 이외에도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 사실 지금 가장 급한 건 책상을 누르는 복부에 쌓인 지방을 태우는 일인 것 같은데, 오늘 점심도 맛있는 메뉴가 나왔다고 대책 없이 또 과식해 버렸다. 시간 날 때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놈의 에너지 절약 본능을 이겨내는 게 그토록 어려운 현대인의 본능에 굴복하고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상상만 해온 전역이라는 순간이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전역이 20대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아가려나. 성인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의 3년, 전역 이후 학교 졸업까지의 3년, 졸업 이후 3년까지 하면 20대가 끝난다. 이제 첫 번째 장이 끝나고 두 번째 장에 접어든다고 생각하니 여전히 시간적으로는 많은 기회가 남아 다행인 것 같다가도, 첫 페이즈는 별다른 성장을 이뤄내지 못한 채 오르내리기만을 반복한 것 같아 씁쓸하다.


군 생활 초기에는 ‘y = x’ 그래프처럼 꾸준히 여러 면에서 발전하면서 나갈 때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초반 빠른 성장세에 취했던 건지, 어느 순간 현 상황에 만족한 채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했고, 이제는 오히려 퇴행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플랜이 망가져버렸다. 옛날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온전히 공감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이유 불문하고 열정과 자신감으로 넘쳐있던 그때의 모습을 보면 그때의 목표대로 제대로 해나가지 못한 것 같아 괜히 스스로에게 미안해진다.


후회라는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보기에 후회는 과거에 잘못한 것이나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은 것들로 넘쳐나는 과거에 대한 재도전의 의지라기보다는, 과거에 그려온 이상대로 살아가지 않아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가지는 일종의 죄의식이다. ‘이렇게 안 하고 저렇게 했으면 좀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텐데’, ‘그때 기회가 있을 때 더 열심히 했다면 어땠을까’ 등의 말을 하며 과거에 대한 아쉬움만을 내비칠 수 있을 뿐, 그때로 돌아가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불가역적인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바로 후회다. 언젠가부터 순간의 선택과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미래에 대한 그림이 작게나마 보이기 시작했고, 실제로 선택의 순간에, 새롭게 열린 시야를 통해 보는 것들이 일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꾸지 않은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현재 상황이라는 조금 아쉬운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지나간 시간 속 과오를 반성하고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보증 없는 약속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비슷한 일이 요즘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그걸 해소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문제들을 빠르게 파악하고 피드백해야 하는데, 좀처럼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이 앞으로의 시간 동안 계속 내 앞길을 가로막을 것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작가의 이전글 정체된 구독자 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