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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Apr 19. 2023

전역

전역하고 난 후 쓴 좀 긴 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역을 했다. 1년 반 동안 간절하게 바라오던 순간이었지만, 전역이 여러모로 스트레스 받던 어떤 힘든 과정의 끝이 아니라 앞으로 마주할 인생의 새로운 막의 시작이라는 걸 알기에, 단순히 전역해서 무언가 다 끝났고, 중요한 걸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나를 올가 매던 국방의 의무라는 사슬로부터 불완전한 해방을 맞이했지만,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군대를 나오면서 더 이상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내 시간을 바치지 않아도 되기에 앞으로의 시간에 긍정적인 전망이 생김과 동시에, 이제는 군대가 아닌 나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이 철조망이 되고,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온전히 내가 져야 한다는 걸 알기에 설명하기 힘든 부담감이 존재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군대 안에 있을 때가 마음은 편하다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군대에서의 마지막 밤에도 어김없이 잠을 설쳤다. 역시 말출 동안 꼬일 대로 꼬인 생활패턴을 3일이라는 시간 안에 완전히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아쉬운 마음에 12시까지 동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누우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도무지 떨쳐내지 못한 상념들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전역 후 뭘 할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에 가는 중동(비록 2개국이지만) 여행과 군대에서 모아놓은 돈을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다가 이런저런 변수가 더해지니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내 커리어에 있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됐다. 

비교적 구체적인 가까운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느 정도 확실한 그림이 그려져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불확실하다 못해 추상적이라고 해야 하는, 제대로 그림조차 그리기 힘든 먼 미래를 생각하니 증기로 가득 찬 것처럼 머릿속이 뿌예진다. 유난히 부대에 있을 때 이 현상이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안에 있으면 여러 가지 것들, 특히 먼 미래의 일들을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복잡해진달까. 좀처럼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가 없으니 잠을 들 수 있을 리가...

어찌어찌 잠들었지만 역시 피로를 쫓아내기에 4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건지 전역하는 날 아침이란 산뜻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조차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마지막 점호는 늦지 않게 나가려고 어떻게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침대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다. 

뭐 새벽 날씨가 원래 그렇다지만 인제는 유독 일교차가 심해 새벽에 핀 뿌연 안개에 부대 주의를 둘러싼 산과 언덕의 형체가 전부 가려져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든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 태양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나면 곧바로 걷히겠지만, 당장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막연하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확신에 찬 태도 따위는 내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안개에 가려 모습을 감춘 부대 주변 풍경이 마치 내가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미래의 시간 같았다. 어차피 지금 어떻게 발버둥 쳐봤자 볼 수 없고, 오히려 일출을 겸허하게 기다리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 텐데. 막상 보더라도 그다지 의미가 있을지 의문인 미래의 결과에 집착해 그곳으로 향하는 중간 과정에 소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점호는 마치고 난 후, 7시를 좀 넘으면서 태양이 그 위엄을 드러내면서 안개를 걷어갔다. 정말 전역이었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작년 유격훈련 때 향로봉에서 일출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붉게 물들어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노랗게 변한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거쳐온 과거의 시간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돈은 돈대로 나가서 다닐 수밖에 없는 미국 대학교 생활, 공부는 하기 싫고 실컷 놀고 싶은데 막상 실컷 놀아도 도저히 달래지지 않는 무료함과, 함께 찾아오는 공허감, 그리고 분명히 삶이 잘못된 방향을 향해있다는 자각 속에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열등감과 자기혐오까지. 그런 온갖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군 입대였다(원래 입대일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의지만 있었으면 충분히 미룰 수 있었으니까). 비겁하지만 군대는 그런 나에게 좋은 유예기간으로 다가왔기에, 사람들이 흔히 가장 현타가 온다는 입대 첫 기상나팔 소리가 오히려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듯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며 어느새 1년 6개월이 흘렀다.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과연 내가 그리는 미래의 목표와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간인가? 오래전부터 에너지 연구원이라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지만 확실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항상 방향성도 분명했고, 해야 할 일들이 비교적 단순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저 맹목적인 목표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과 대학 전공,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선택했던 조건과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정말 하기 싫었으니까. 

뭔가를 새롭게 배우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걸 위해 매번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 억지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과 원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걸 몰랐다. 지금도 그다지 다른 것 같진 않지만. 그래서 어느 순간 (어떻게 해서든 내려놓으면 안 되는) 내 앞의 부담거리들을 가차 없이 내려놨다. 지금 와서 보면 그때는 실컷 놀고 싶은데, 또 일은 생각한 대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낭비한 시간에 대한 후회가 쌓이고 쌓이면서 입대 한 달 전이 되어서야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이나마 삶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다. 훈련소에서 식사량을 줄여가면서 살도 빼고, (과거 카운슬러가 글쓰기 수준이 낮다고 지적한 기억의 영향도 있지만) 정교하게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인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하고, 21년 인생 동안 학교 수업에서 책을 읽으라고 할 때마다 귀찮아서 일부분만 읽고 나머지는 인터넷에서 줄거리 요약을 찾아보는 독서를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라는 책에서 나와있듯이, 그런 작은 습관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사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내가 갖추어야 하는 자질들 중 하나였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에 취했던 건지 그때는 내가 뭔가 큰 업적을 이룬 듯한 착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늦은 출발에서 이제야 조금씩 정상 페이스를 되찾아 가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무조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오만에 빠져 잘못된 길로 빠져들 때 재빨리 피벗 하지 못한 게 큰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업다운이 반복되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전역 직전이 되어서야 막연하게 어떻게 살지 고민만 해왔던 군 생활 이후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그동안 내가 살면서 회피해온 것들의 결과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구상 속에서 “꾸준히 노력만 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전제조건이 사실 그 어느 것보다도 어려운 것임을 23년 인생을 통해 확인했기에, 군대에서 이뤄낸 변화를 생각하면 자신감이 생기면서도 수많은 유혹과 변수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군 생활 동안 보인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158편의 책을 읽고, 629편의 글을 쓰면서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인간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다른 인간이 된 지금의 나조차 여전히 이르고자 하는 경지에 한참은 멀었다. 합스에서의 3년은 나에게 나는 무조건 노력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줬다면, 군대에서의 1년 반은 단순히 노력만 하는 상황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끊임없이 최선의 선택으로 피벗해야 한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간 방향성을 제시했다. 20대의 3번째 장인 미국 생활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미국 생활에서 얻은 깨달음의 형태가 후회에 가깝다면, 내 인생은 분명 기대했던 것과 달리 선로에서 상당히 탈선해 있는 모습일 거라는 사실이다. 살면서 어느 정도 탈선이 있어야 깊이가 쌓인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미 수없이 많이 해왔기에 이제라도 정도를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군대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나름 그들에게서 얻어 간 만큼 보답하는데, 잠을 설쳐가며 생각하게 될 정도로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에 시달리느라 솔직히 정신이 없다. 여유를 가지면서 주변을 둘러볼 줄도 알아야 하는데, 너무 나 자신의 일들에만 몰두하느라 다른 사람들과의 소중한 너무 쉽게 흘려보낸 걸 막상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현실이 야속하다. 그래도 상황 가리지 않고 내 주변에서 여러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나름 인복은 타고났다는 사실은 항상 감사하게 된다.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정작 주변 사람들은 제대로 안 챙기는 모순을 보이는 게 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데, 군 생활 동안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은 못 얻어 간 게 아쉽다.

어쨌든 전역을 했고, 이제는 더 이상 신성한 국방의 의무, 상명하복이라든지 하는 듣기만 해도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질서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좀 더 온전히 나의 길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 그렇기에 어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군대니까 괜찮아라는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문제대로 최대한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강점은 어떻게든 극대화해야 하는 수많은 과제가 눈앞에 다가가왔다. 시야를 흐리게 했던 삶의 안개가 전역과 함께 깨끗이 걷혔고, 지평선 너머처럼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아득한 인생의 길 위에서 또다시 새로운 행군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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