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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un 23. 2023

뜬금없는 군 생활 시절 이야기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누군가 시골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군용차에 경례하는 영상을 봤다. 그런데 차에 있는 부대 번호 5969는 우리 부대의 여단 중 하나고, 풍경 자체가 어딘가 매우 익숙했는데 다름 아닌 주둔지 근처에 있던 용늪 마을이었다. 


딱히 식당이나 가게가 없어 평소에 갈 일이 없던 곳이었다. 그러나 매번 국지도발 훈련 때마다 용늪 마을에다가 초소를 설치했고, 유격훈련 때 근처 훈련장에서 숙영했던지라 원통과 천도리와 함께 군 생활동안 유난히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다. 무엇보다 전역 2달 정도 남기고 부대원들끼리 용늪 마을 안에 있는 피시방 펜션을 잡아서 하루 종일 게임했던 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시설 자체도 쾌적할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물가가 있어 여름에 오면 정말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전역한 이후에는 이곳에 올 일이 좀처럼 없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화면으로 보더라도 용늪마을의 풍경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전역한 지 어느덧 2달이 지났다는 게 체감이 안된다. 그 짧은 두 달이라는 시간 차이지만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그 안을 살아가는 나의 태도나 습관에도 큰 변화가 생긴지라, 전역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달까.


일과나 근무도 그렇고 종종 영외 훈련도 있던지라 시간적 여유가 많진 않았다. 그래도 나름 목표의식과 열정이 있어서 부족하더라도 촘촘히 쪼개서 뭔가를 해보려고 아등바등했고, 그런 것들이 쌓여 중요한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나온 이후에 충분한 시간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소모적인 것들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개인 공간이 생겼지만 잡동사니로 둘러싸여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여유는 많은데 해야 할 일에 할당하지 않으니 오히려 촉박한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뭔가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삶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지만, 규칙적인 수면패턴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가운데 세워놓은 계획들은 매번 물거품이 되고 있다.


금요일에 오랜만에 군대 동기를 만났다. 8월에 복학해서 서울로 올라오기 이전에 부산에 머물면서 아침에는 운동을 한 후 오전과 오후 동안 개인적으로 투자 관련 일을 하는 생활을 한다는 근황을 들었는데, 뭐랄까 그같이 삶을 일정한 규칙이나 질서에 쉽게 맞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지만 정작 그게 주어졌을 때 찾아오는 혼란과 무질서를 지혜롭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를 그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괴감이 든다. 


결국 자율적인 게 안되면 밖에서 통제가 들어오는 수밖에 없는데, 과연 학교에 간다고 안 좋은 습관들이 자연스럽게 고쳐지려나 의심이 든다. 최근 확인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면 생활의 방식도 그렇고 나라는 인간 자체에도 변화가 생겨야 한다는 건 분명한데, 핑계 같지만 내가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인지 확신조차 없다. 이런 식의 말을 함으로써 자꾸 나한테 한계를 부여하는 것 같은데, 냉정하게 보면 이게 내 현실이라...


다음 주에 부여에서 3 중대원들끼리 동기가 운영하는 60계 치킨 부여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는 김에 코레일 내일로 패스를 사서 일주일 정도 국내여행을 계획 중인데, 오랫동안 가보지 않았던 고향 전주도 가보고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비교적 소홀했던 한국이라는 내 아이덴티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적, 문화적 공동체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돌아다니는 김에 다른 지역 야구장도 좀 가보고. 


지금 중대 전체가 KCTC 훈련을 나갔다. 군 생활 시절 후임들은 아직 현역이라 다 훈련을 나갔는데, 요즘 갑자기 35도 가까이 찍을 정도로 기온이 올라서 별 탈 없을지 걱정이 된다. 내가 갈 땐 7월이었는데, 인제가 대부분 산악지역이라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참기 힘들 정도로 덥진 않았고, 실제로 문제가 됐던 건 일주일 가까이 씻을 수 없어서 생기는 찝찝함과 나무와 풀 사이에 있는 진드기와 모기였는데 6월에는 어떠려나 모르겠다. 그때 진드기에게 물려서 생긴 자국이 전역할 때까지 안 지워져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그래도 거의 1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다.


이제 와서 보니 우리 중대가 나가는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KCTC에 나가고 싶어 했던 1년 전 선택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나름 인상적이다. 보상(미래) 같은 건 상관 안 하고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과감하게 시도하는 도전 정신이라는 게 참. 지금은 뭐든 작은 거라도 하려고 할 때마다 손익을 따져가며 계산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면서 결국 시작 자체가 늦춰져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과거의 나로부터 배울만한 점이 꽤 많다는 걸 볼 때마다 항상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조가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나에게는 실존주의적 태도가 필요해 보인다. 결국 삶 자체가 우리 의지와는 무관히 정말 많은 것들이 외부요인에 의해서 결정되고, 때로는 그런 것들이 손써보기 힘들 정도로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운명의 변수들은 우리의 처지 따위에는 매정할 정도로 무심하기에, 너무할 정도로 무관심한 세상을 살아가며 원하는 걸 쟁취하는 건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100만 원이라는 최저시급을 받았던 시간이 오히려 더 풍족했고, 나를 구속하던 통제적 질서가 있을 때가 모든 면에서 더 자유로웠던 모순을 생각하면 그게 바로 군대에서의 시간이 나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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