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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un 28. 2023

술을 마시면

  

난 술을 잘 못 마신다. 알코올 특유의 쓴맛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비슷한 이유로 커피도 잘 안 마신다) 아시아 홍조 증후군 때문에 소주를 반 병 정도만 마셔도 얼굴이 확 달아올라 후끈후끈해진다. 그나마 지난번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서 진저 하이볼이나 여러 준마이 다이긴조 사케같이 쓰지 않고 오히려 단맛이 강한 술을 마셔봐서 맛 측면에서는 술을 덜 꺼리게 됐는데, 아시아 홍조 증후군은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체질 같은 거라 도저히 술과는 친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친한 사람들이 아니면 좀처럼 마시지 않는 편이다.


술과 가까워지려야 도무지 가까워질 수 없는 나에게도, 술을 마실 때만 느낄 수 있는 좋은 느낌이라는 게 있다. 마시고 난 후 한순간 온몸이 후끈하다가도, 시간이 좀 지나면서 얼굴에 있던 홍조가 가라앉을 때쯤 찾아오는 한기. 날씨 상관없이 실제로 춥지 않아도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오들오들 떨게 되는데 그 순간 찾아오는 한기로 인한 오한과는 달리 속으로는 평정심을 되찾게 되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이상하리만치 질서정연하게 정리되면서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다. 아직까지는 취해서 가버릴 정도로 많이 마셔본 적은 없는데, 적당히 마시면 찾아오는 침묵은 음주 후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평화의 순간이랄까.


체질 얘기를 해보자면, 난 더운 것보다 추운 걸 선호한다. 뭐든 극단적인 것보단 적당한 게 좋지만 둘 중 확실히 추운 게 낫다. 조금이라도 더우면 땀이 물 흐르듯이 흐르고, 책상에 맞닿은 팔은 금세 땀에 젖어 끈적끈적 해지며, 사람이 여럿 모여있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질 법한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해지면서 온몸에 열이 모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가뜩이나 평소에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과 분노를 통제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그런 상황이 오면 유독 상황과 관계없이 화가 난다. 온 세상이 나를 적으로 돌린 상황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


여름이 찾아오면서 다시 그런 느낌이 심해졌다. 군대나 학교에서는 에어컨을 잘 틀어줘서 덜한데, 집에서 에어컨을 잘 안 틀어서 날씨가 덥진 않아도 공기가 습해 쉽게 답답함을 느낀다. 특히 내 방은 창문이 밖이 아니라 베란다랑 연결되어 있어서 환기도 잘 안돼서 그런 느낌이 더 심하다. 거기다가 노트북 발열도 심해서 방 안에서 문을 닫아놓거나 선풍기를 안 틀고 뭔가를 한다는 건 내 체질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답답하니까 자꾸 늘어져서 뭘 해야 할 때는 되도록 집에 안 있으려고 하는데, 규칙적인 일정이 없는 요즘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은지라 남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못 쓰기도 하고, 그렇다고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으면 금세 비염이 심해져서 하루 종일 코를 훌쩍이며 고생해야 하고, 여러모로 문제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돌아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더워서 땀이 흘러도 몸은 바들바들 떨리면서 일종의 인지부조화가 찾아오게 되고, 그런 감각의 모순적 충돌 속에서 온전히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몸에 힘이 바지니까 자연스럽게 침착해지고, 그동안 감정적으로 생각했던 문제에 대해 오히려 더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술의 맛만 생각하면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지만, 약간 취한듯싶다가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오는 싸늘한 정도의 시원함과, 수월하게 풀리는 꼬인 매듭 같은 생각들. 고맙게도 이런 혜택들을 누리는 데에 소주 반 병이면 충분하다. 자랑할 수는 없지만 술찌들만의 장점이랄까.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의 경계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술 한 잔, 그게 특유의 도라지차 같은 달콤쌉쌀한 생강향이 느껴지는 진저 하이볼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시간이 남는다면 다시 한번 기온 마츠리 기간에 교토의 이자카야에서 진저 하이볼이나 한 잔 마시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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