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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14. 2024

대화와 인간관계

미국에 오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 즐거운 경험도 있고, 부담스럽지만 무조건 이어가야만 하는 관계도 있었는데, 이러나저러나 첫 학기를 보내면서 얻은 교훈은 미국에서 성공적인 학업을 이어가는 걸 넘어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의 깊이가 아닌 폭이 더 중요하다는 거였다.


결국 인간관계 이야기를 하자면 돌고 돌아 군대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아직까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과하고 그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면에서 군 생활은 나에게 전환점이었다. 한창 성인이 됐을 때도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을 일삼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며 지냈는데, 당시 코로나 시국의 자가격리는 그런 나를 반쯤은 통제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했다. 한창 열심히 놀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 자체를 넓혀나갈 시기를 그렇게 보낸 탓에 아직까지도 고등학교 친구들 이외의 새로운 깊은 관계가 별로 없다. 전역하고 미국에 와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형성된 자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나에게 군대는 통제의 대명사라는 인식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삶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훈련소와 후반기 교육에서는 하루 훈련이 끝나고 개인정비 중 뉴스를 보면서 일기를 쓰던 때, 자대에 가서는 하루에 한 번 꼴로 서는 탄약고 경계 초소 근무 시간 같이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정말 많았다. 과거에는 말이 정말 많았던 것과 달리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괜히 두려워서 말수가 많이 줄었는데, 여전히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한 순간 깰 수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원활한 대화를 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분위기상 옆에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비교적 편안함을 느꼈다.

 

특히 단 둘이서 좁은 초소 안에 들어가 2시간 동안 한 곳만을 바라봐야 하는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탄약고 경계 근무는 오히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아무 이야기나 다 꺼내게 되면서 평소에 머릿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온갖 특이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 매 근무가 기다려졌다. 개인정비 시간이나 수면 시간이 줄어든다는 문제도 있지만, 그 정도는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기회가 자주 있다는 게 군 생활동안의 가장 좋은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군 생활 내내 밤에 잠들기 전에 한 시간 정도 뒤척이는 게 일상이기도 했던지라 적당히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잠이 잘 오기도 했고.


흔히 짬이 낮을 때는 후임초(부사수)로 들어가서 차이가 많이 나는 선임과 대화할 때 눈치를 많이 보게 되지만(사실 운 좋게도 같이 근무를 선 선임이 나를 재밌어해서 눈치를 별로 안 봐도 되긴 했다), 당시 앞에 있던 선임들이 한창 전역하던 시기여서 금방 선임초가 돼 후임들 뿐만 아니라 동기들과도 자주 서게 됐는데, 그 덕에 순번이 돌아가면서 비교적 다양한 사람들과 근무를 서면서 정말 아무 주제나 다 가지고 대화하는 게 너무나도 즐거웠다. 지금 돌아볼 때 그나마 아쉬움이 남았다면 가장 친했던 선임들과 단둘이서 이야기할 기회가 금방 사라졌다는 것 정도였다.


군생활 내내 글쓰기와 독서에 한창 심취해 있어서 철학 같은 심오한 주제뿐만 아니라 온갖 부대 이야기, 전역 이후 미래 계획 등이 주된 대화 주제였는데, 애초에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끼리 제한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그리 많진 않았지만, 나름 내가 가진 대화 역량을 총동원해 이야깃거리들을 짜냈다. 원래도 아무 말 대잔치를 잘하긴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이야기나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 그 시절의 영향이지 않을까. 결국 진솔한 대화를 많이 나누는 과정 속에서 부대원들과 더 가까워졌던 걸 보면, 새로운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공통의 경험을 함과 동시에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아마 과거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을까), 군 생활동안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 소신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아 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계급 상관없이 우린 다 같은 사람이라는 지금 돌아보면 형식적인 정의관에 불과한 생각들을 최대한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고, 그런 노력에다가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나름대로 군 생활 내내 후임들과 꽤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질서를 따지는 공간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 사이에서 수평적인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략을 만들어나갔달까. 


그런 것들과 별개로 처세술에 있어 여러 문제를 확인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군 생활은 여러 면에서 부딪혀가며 인간관계에 있어 다양한 배움을 얻어간 시간이었다. 최근에 올해 들어 전역한 후임과 전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9개월이라는 꽤나 긴 시간 차이가 나는 후임이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찾아준 건 별다른 의미 부여할 여지가 없더라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오늘 뉴욕에 사는 친구가 베이 에어리어로 여행을 왔는데, 둘이서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캠퍼스 투어를 소개해주다가, 저녁 즈음에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서 그녀와 같이 여행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녀 왈 일종의 세계관 통합이라는데, 어쨌든 방학 동안 좀처럼 사람과 교류할 일이 없다가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상황 자체는 기대가 됐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화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어색했다.  다행히도 다른 일로 계속 전화하느라 거의 절반 동안은 대화에 거의 참여를 안 한 덕에 티가 안 났던 것 같다.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 계속해서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만남들을 마주하게 될 텐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낯선 것을 조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경험들 속에서 얻어가는 것들이 언젠가 새로운 인연을 향한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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