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이야기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들의 배경은 대부분 군산의 할아버지집이었다. 어릴 적 애들끼리만 있던 일상과 달리 나이 많은 친척형들과 놀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재밌었는데, 당시 학교도 들어가지 않던 나에게는 청소년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가지고 있던지라 그들이 하는 행동이나 생활적인 요소 하나하나가 전부 멋있어 보였다. 어렸을 때의 기억들 중 아프고 우울한 기억들도 있지만 대개 재밌게 놀면서 즐거웠던 경험이 대부분인데, 그때로부터 어느 순간 시간도약을 해서 지금으로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금은 앞집이 땅 재산권 주장 문제로 집 주변을 철제 펜스로 둘러싸서 길이 차 한 대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아졌지만, 그전까지는 우리끼리 모여 뛰어놀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비록 오른쪽으로는 가시덩굴로 덮인 담과 왼쪽으로는 배추밭, 뒤로는 내리막을 따라 논두렁까지 있어 격하게 놀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 집 뒤로는 산이 있고, 마당은 온갖 나무와 작물뿐이었던 탓에 우리끼리 놀 수 있던 곳은 그 좁은 길이 유일했다.
무슨 계절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논밭에 물이 차 있던 걸 생각해 보면 아마 늦봄이나 여름사이였을 거다. 흔히 다 같이 놀 때 소위 국룰이라고 부르는 암묵적인 규칙인데, 보통 공이 다른 곳으로 빠지거나 하면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가 직접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당시 5,6살에 불과했고, 갓난아기였던 다른 동생들을 제외하면 막내였던 나는 부모님이 매번 오냐오냐 해주는 도련님 생활만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기억이 왜곡된 거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어렸을 때 엄청 많이 혼나고 중학생 이후로는 부모님이 큰소리치면서 나를 혼낸 적은 없다), 내가 찬 공이 논으로 빠졌는데도 괜히 가져오기 싫다고 심술을 부렸다(와 다시 생각해도 진짜 어이없긴 하네. 자기가 찼으면 그래도 가져와야지). 형누나들이 나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초등학생도 안 된 나에게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리가 만무했다.
결국 동생의 고집에 대한 연대 책임으로 형이 대신 공을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할아버지집 앞 논두렁이 특이하게도 도로에서 3-4미터 아래 꽤나 깊게 파여 있는데, 낭떠러지까지는 아니지만 경사가 꽤나 높은 언덕 같이 돼있어 지금도 매번 군산에 갈 때마다 좁은 길을 돌 때마다 자칫하다 차가 그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렇게 어찌 아래까지 내려갔지다가 공을 갖고 올라오던 형은 발이 젖은 땅에 미끄러져 그대로 논두렁에 빠졌다. 옷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됐고, 그날 여벌의 옷을 챙겨 오지 않았던지라 엄마가 급하게 더러워진 형의 옷을 부엌 옆 수돗가에서 빨았던 걸로 기억한다(이때의 기억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당시 나를 두고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런 사건들을 통해 쌓이고 쌓인 이미지 탓인지 최근 오랜만에 만난 친척 누나가 나를 여전히 말썽쟁이로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님은 애초에 자세한 상황 자체를 몰랐고, 다른 사람들은 책임소재를 따질 정도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사실 야생에서 동물끼리 잡아먹는 걸 두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물리적으로 형을 논두렁으로 밀었다면 모를까 아집 자체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 자체가 어릴 적 나에게 말로 설명 못할 충격이었던 걸까, 딱히 가족들한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거에 대해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난 후였다.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넣은 “선생님"의 아집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그것과 너무나도 닮은 그날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 내가 보인 아집은 물리적이진 않지만 갓 초등학생이 됐을 뿐인 형의 마음을 깊은 논두렁으로 밀어 넣었기에, 궁극적으로 찾아온 결과의 정도의 차이일 뿐 “선생님"과 내가 한 행동은 본질적으로 같은 게 아닐까. 의도치 않더라도 누군가의 이기심에 대한 집착은 타인을 쉽게 곤경에 빠뜨릴 수 있고, 그건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연령과는 무관하게 벌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형 관점에서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나름 둘 다 부모님이랑 관계가 매우 좋다고 생각하는데, 뭐랄까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2살 차이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형제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는 어딘가 대조적이라고 느낀다. 형은 좀 더 많은 현실적인 것들을 요구받는 반면에 여전히 귀염둥이 막내 취급을 받는 나는 많은 기대와 걱정, 그리고 금전적인 투자를 받으며 의존적인 생활을 한다. 그러나 정작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에다가 앞으로 꽤나 긴 시간 동안 미국에 있을 걸 생각하면 결국 긴 시간 동안 가족 곁에 있어온 건 형이다. 그 이유 때문에 형의 인생을 두고 불쌍하다고 여긴다면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것이기에 그걸 두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별생각 없이 나름대로 형을 생각하는 척이라고 하고 싶던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형한테 조금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기억은 한순간이었지만, 어쩌면 형과 나 사이의 아이러니한 불균형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게 싫지만 나의 삶을 지탱하는 수많은 모순덩어리들에 관련된 순간들을 떠올릴 때, 불가피하게도 그 조각들에는 항상 형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가 찬 공을 줍다 논두렁에 빠진 형, 그리고 위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나, 어쩌면 논두렁과 도로를 잇는 3,4미터 높이의 언덕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길 만큼의 불균형이 존재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