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추억의 공간, 김제 시골집 이야기
6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옛집에서는 메리라는 이름의 개를 키웠다. 내가 어렸을 때 죽은 지 오래라 무슨 종이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당시 나랑 덩치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대형견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비 오는 날 미키마우스 멜빵바지를 입은 채 마루라고 하기도 무안할 정도로 작은 단상에 앉아 신발 끝을 적시며 정원에 있는 큰 감나무를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 옆에 앉은 채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메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고 보니 군산 친가에도 감나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추석에 갈 일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나무가 죽은 건지 최근에는 감나무에서 열매를 본 기억이 없다.
봄에는 감나무 뒤 밭에서 나는 딸기, 여름에는 황토방 옆 밭에서 키운 참외, 가을에는 족히 어른들 키의 족히 몇 배는 될 정도로 큰 감나무에서 직접 뜰채로 딴, 나에게 떫음이 무슨 느낌인지 알게 해 준 감, 그리고 겨울엔 그 모든 것들을 하얗게 뒤덮어 버리는 순백색의 눈꽃까지. 근처 여자 고등학교에 있는 인조 잔디구장 정도를 제외하면 마땅히 놀 곳도, 그럴듯한 구멍가게조차 주위의 드넓은 논밭을 따라 30분은 넘게 걸어야 나오는 김제의 시골 동네였지만 외가는 집 그 자체만으로 여러 놀거리를 제공해 줘 당시엔 심심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사람이 많은 친가와 달리 외가에선 이모만 둘인 데다가 엄마가 장녀고 이모들과 나이 차이도 좀 났기 때문에 당시에 같이 놀 수 있는 사람은 나와 형, 그리고 사촌 동생까지 셋뿐이었는데, 적은 숫자였지만 서로 짝짜꿍이 잘 맞았던지라 즐겁게 논 기억들 뿐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추억이 됐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에 할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녀야 해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 다 막내이모집에 얹혀살게 되었고, 군산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청소하러 들르던 엄마도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가족이 다 분당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김제에 있던 집은 가끔 할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러 내려가면서 묵을 때를 제외하면 사실상 방치된 채로 먼지만 쌓이는 신세가 됐다. 추억은 떠나보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지만 김제의 집은 너무나도 빨리 내 삶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엄마에게서 곧 할아버지가 집을 처분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어른들의 사정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대충 들은 내용에 의거해 상상력을 보태자면 은퇴 이후 초록색 번호판에 2222를 단 홍진호 그랜저를 끌고 서울과 김제를 오가던 할아버지는 은퇴 이후 여러 사람 만나서 노는 걸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것과 달리 모아둔 노후자금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예전에는 농협 지역 조합장을 맡았고, 정치 입문도 노려봤을 정도로 활발한 대외 관계를 유지했던 걸 생각하면, 할머니의 병원비 같은 여러 지출이 있는 상황에서 온전히 할아버지의 유희랑 감당하긴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지역에서 나름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덕에 물려받은 땅이나 재산은 꽤 됐었는데, 김제에 있던 집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리 시골이라고는 해도 논밭을 제외해도 밭도 그렇고 집 부지가 가족끼리 살기에도 정말 넓다고 느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인생의 황혼기를 좀 더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집과 거기에 딸린 밭을 아는 사람에게 처분한다고 했고, 그럼 그 집이랑 황토방은 어떻게 되냐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아마 산 사람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을 지을 거라고 답했다. 그럴 리가, 그래도 수많은 추억의 배경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될 리가 없다는 걸 알고도 충동적으로 엄마에게 내가 나중에 갚을 테니까 그 집을 우리 가족 돈으로 사면 안 되냐고 졸라봤지만, 엄마는 그저 중2병 걸린 나의 아무 말로 치부해 버리고 넘겨버렸다.
사실이었다. 가진 거라고는 가방 안 교과서와 필기구뿐인 고작 중학생에 불과한 내가 갖기에 그 집은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이었으니까. 막상 돈이 있어 그 집을 사더라도, 또다시 반쯤 폐가가 될 때까지 방치된 채 옛날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으니까. 엄연히 따지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그 집 자체라기보다는 그리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고, 그걸 기억하기 위한 공간까지 지키기에는 내가 가진 게 없었다. 지킬 것보단 얻을 게 더 많은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소중했던 것들을 떠나보낸다. 최근 오랜만에 본 토이스토리 시리즈가 나를 감성에 젖게 하던 것도, 앤디의 소중한 장난감들처럼 우리의 살면서 지나온 수많은 과정 속에서 거쳐온 소중한 추억과 그걸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집을 처분하고 목돈을 장만하신 할아버지는, 불행하게도 몇 년 못 가 암으로 항암치료를 하시며 병원에서만 지내다 암 자체는 상태가 꽤나 괜찮아졌다고 모두 안도하던 시점에 갑자기 기력이 쇠해 돌아가셨다. 집을 판 돈 중에 얼마나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고등학생 밖에 안 된 세상 물정 어두운 내가 봐도 병원비가 더 많이 나갔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여러 사람의 죽음을 목격할 만큼 아직 내가 거쳐온 길이 그리 길지 않지만,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당시 받은 충격과, 그때 깨달은 삶의 아이러니의 임팩트는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사건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결국 물리적으로 사라진 김제의 그 집은 추억의 공간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차가 생겨 혼자 그곳에 갔다 올 수 있을 때가 된다면 한 번쯤은 어린 자녀를 데려가 그곳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데, 시대도, 물리적인 풍경도, 그것들을 보는 주체도 다른 상황에서 그 아이는 무엇을 보고 기억하려나. 점점 시골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세태를 생각하면 그곳에서의 경험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어린 시절과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