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빈 Jan 31. 2023

여전히 나는 슬프다.

가족의 문제를 다 다루고 감정도 다 다루었다 생각했다.

수치스러웠던 가족의 과거사,

나의 학력콤플렉스,

가족을 향한 미움과 원망을

상담을 통해 다 털어냈고 불편감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생각했다.


그제와 어제,

나는 양일간 16시간동안 집단상담에 참석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야기를 할 동안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난 이미 다 털어냈는데? 다 해소시켰는데?

말해봤자 해소시키고 남은 텅텅 빈 깡통뿐일텐데?


그렇게 16시간의 집단상담에 참여하며

다른 사람의 슬픔에 직면을 잘 하지 못하는 날 발견했다.


이전 집단상담때도 나는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았다.

타인의 아픔에 문제 해결만을 제시하고 공감따윈 없었다.


그리고 이번 집단상담때에는

그때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

다짐하고 참석했지만

여전히 나는 타인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인지적으로 무언가가 감정을 차단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울컥하려다가도 이내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고

인지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모두가 울고, 감동하고, 공감할 때에

나는 혼자 심각해졌다.


리더는 내게 왜 그렇게 심각해졌냐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더니 너무 이입했냐

물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분명 아주 힘들었던 과거와 외로웠던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인지적으로 이야길 들으며 감정에 동요가 없는 나 땜에 심각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곧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집단상담에서 무얼 이야기할지 전혀 몰랐다. 그 날 오전까지도.

별다른 이슈가 없다 여겼고

그래서 할 말이 없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에 직면을 못하고,

오히려 거기서 분노를 찾아내어 분노하는 날 발견했다.


살아오며 나의 메인 감정은 늘 분노였다.

날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부모를 향한 분노,

날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권위자를 향한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분노를 내면으로 감추지 않았고

청소년기에는 비행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비행이 나를 살렸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그것 마저 없었다면

나는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라고.


내게 있어 분노는 매우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반골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집단에서 많은 이들이 슬픔과 아픔을 말하는데,

나는 혼자 그들을 아프고 슬프게 한 대상에게 화가 치밀었다.

다들 그들을 애도하고 슬퍼해줄 때에

나 홀로 그 새끼 미친놈이네 라는 분노를 표출했다.

내게 있어 분노는 자연스럽고 쉬웠지만 슬픔과 아픔을 느끼기가 여전히 어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나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했던 아빠,

좋게 말해서 순수하고 천진난만했던 아빠,

다단계도 빠지고 사업도 말아 먹고 보증도 잘 못 서고 사기도 당하고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집안의 기둥은 커녕 미약하게 나마 지탱하고있던 기둥조차 본의 아니게 뽑으려 들었던 아빠.


그런 아빠로 인해 실질적 가장을 하며 집안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교대돌며 하루도 못쉬고 공장에서 일을 했고 현재까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엄마,

그리고 삶의 무게와 힘듦에 짓눌려 나를 향하던 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혼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같던 엄마로 늘 가정에서 불안했던 나.


돈이 없어 대학에 안갔지만 자존심에, 엄마아빠가 상처 받을까 뚜렷이 하고픈게 없어 대학은 안갈래 라고 큰소리치던 나.

80년대, 90년대도 아니었고, 그 시절 대부분이 당연한 듯 대학을 가던 시절이었지만 내가 대학을 가는 것이 불효라 생각하여 포기했던 나.

그런 부모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나.

그리고 나를 창조한 이들, 나의 근본부터가 부족하고 모자라단 사실에 나에 대한 존재적 수치심으로 이어졌단 삶.

나의 엄마를 따라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을 했고,

내 돈 벌어 캐나다에 공부하러 떠나서는 돈이 얼마 없으니 맨 몸으로 부딪혀가며 쓰리잡을 뛰고 유학원을 통하면 비싸니 직접 캐나다에서 손짓 발짓해가며 가장 저렴한 어학원에 무작정 찾아간 일,

다른 유학생들은 편안하게 부모 돈으로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고 공부하는 동안 쓰리잡에 코피쏟을 것 처럼 힘든 열악한 상황 속에서 공부한 일.


그러한 일련의 이야기들을 던지며 나는 눈물을 쏟았다.

집단 상담에서 다룰 주제가 없다 생각했지만 두서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저리던 나는 나의 불쌍한 어린 시절이 또 다시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았다.


다 애도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고통받던 내가 치유되었다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아동기의, 10대, 20대의 내가 슬퍼하고 있었나 보다.

남들 다 가는 대학을 포기하며 자존심에 난 하고 싶은게 없으니 라는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이 미친듯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부모 도움없이 대학을 갔고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 대학을 포기했어야만 했던 내가 너무 가여웠다.


정말 하고픈게 딱히 있진 않았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돈 안날리고 옳은 선택이었다 생각하지만,

대학을 떠나 다들 당연한 듯 누리는 것을 나는 포기해야 하는구나, 내 부모의 사회적 위치가 이러하구나, 내 부모의 위치가 결국 나의 위치구나, 대학을 시작으로 이제 앞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줄줄이 펼쳐져 있겠구나. 여러 생각이 들었고 나는 좌절감을 느꼈었다.

날개 한번 못 펼쳐 보고 꺼지는 구나.


그렇게 공장에 들어 갔고, 기숙사에 들어가는 첫 날.

군대가는 남자들이 이런 심정일까를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꽃다운 친구들 사이에 섞여 꾸역꾸역 발길을 옮겼다.


한창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어야 할, 만개해야 할 나이의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보면 칙칙한 사원복을 입고,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갑갑한 미래를 느끼고 있었다.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하던 당시, 나는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군대에 들어갔다 생각한다는 글을 끄적이고 회사에 입사했다.



물론 그 속에서도 나는 밝았고 잘 해내었다.

표면적으로는.


속은 하기 싫은 공순이 짓을 꾸역꾸역 해내며 문드러지고 있었지만, 엄마에게 감사한게 있다면 어마어마한 생활력을 물려주었다.


엄마를 통해 만렙의 생활력과 책임감을 보고 자란 내가 악바리같이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린 시절 날 회상하며 슬프고 속상해 눈물을 한바가지 흘렸다.


그리고 이런 이야길 할 수 있다는 것은

더이상 내게 가족은 수치가 아니고,

나의 학력 콤플렉스도 다 해소가 되었고,

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도 다 해결이 되었다 생각하여 나는 울음을 토해내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 해소했다면 나는 왜 아직 울고 있는 건데?

아니, 19살, 20살의 나는 왜 여전히 울고 있는 건데? 라는 의문.


리더는 내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너가 어떤 기분이 들었냐고.


모든 이들의 아픔은 주관적인 거라 그들이 나만큼  아팠을 것이라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향해 부러웠다 말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부모가 멀쩡히 잘 기능하는 사람들이고 사회적 위치, 경제력도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었네.. 나는 왜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났던 걸까? 왜 나는 태어나자마자 가족의 경제력, 사회적 위치가 나의 것이 되었을까, 나는 왜 태어난 순간부터 출발선이 저 멀리 뒤쳐져 있었을까, 나는 왜 태어나자마자 나의 계층이 저 밑바닥부터 시작한 걸까? 라는 생각에 부러웠다 말했다.


물론 태생이 가난하고 낮은 계층에서 태어났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내게 나는 굉장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낀다.

무언가 사회적으로 이루었고, 신분의 상승때문이 아니라 여기까지 올라오게 한 나의 삶의 태도에 자긍심이 있다.


엄청난 책임감과 생활력, 악바리같은 근성,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에너지, 타인에게 나를 당당히 표현할 수 있는 내면의 힘.


부모 돈으로 편히 살아온 이들이 갖지 못한 거칠고 질긴 잡초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고,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


그럼에도 꽃다운 나이의 나는 울고 있다.

슬퍼하고 있다.


집단에서 사람들은 내게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주었다.

사실 그것이 내 모습인걸 안다.

표면으로 자주 드러나는 내 모습.

의식해서 하는 행동도 아니고

감추려해도 드러나는 힘임을.


그래서 이번 집단 상담에서 목표는

나약하고 여린 내면의 나를 다 드러내자

라는 목표를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에 실패해버렸다.


여전히 사람들은 약한 날 드러냈음에도

넌 굉장한 힘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이야기한다.


그래, 이게 내 모습인데 어쩌겄어.

든든하다는데, 힘이 느껴진다는데

쓰러지려는 내담자에게 든든하게 힘있게

옆에서 버티고 있어 줄,

힘있게 끌어 당겨 올려 줄 상담사가 되면 되는거지.


그리고 집단 상담을 통해 다시금 고개를 내민

꽃다운 나이의 나를 위로해주어야지.

안아주어야지.


너 참 고생 많았어.

네 덕분에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

부모가 못해 준 걸

네 스스로 이루었어.

네가 너의 부모가 되어서.

많이 힘들었지?

고마워 열아홉, 스무살의 수빈아.

매거진의 이전글 원시티가 죽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