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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Jan 31. 2023

원시티가 죽었다.


원시티라는 아파트에 살때

아파트 화단에서 주웠던 새끼달팽이.


이름은 단순하게도 원시티가 되었다지.

그(자웅동체라 그라 칭해야 할지 그녀라 칭해야 할지)의 출신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름이라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었어.


마치 내가 마이구미 젤리를 볼때마다

나의 구미를 떠올리던 것처럼

원시티라는 이름을 불러 줄때면

너의 출신인 그 화단을 기억하라고.

물론 달팽이이기에 전혀 내 말을 알아 들을 일도, 또 기억해낼 일도 없겠지만.


그냥 내가 너를 부를 때면

너는 원시티 화단을 추억하곤 할 것 같았지.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처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너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랄까

뭐 그런거라고 할 수 있지.


넌 그 때 형제인지 친구인지 모를 아이들 둘과 함께 입소하였지.

하나는 일산, 하나는 킨텍스.

같은 의미에서 지어진 그들의 이름.


비오던 다음 날,

너를 처음 주워왔을때 팔땡이와 나는 신난 발걸음으로 집앞 이마트를 향했어.

흙과 먹이와 집을 사기 위해.

마치 새강아지를 분양받아왔을때처럼

나는 기뻤고 신났고 사랑에 넘쳤어.


적당한 크기의 채집통에

폭신한 코코피트를 깔아주고

신선한 야채를 넣어주었어.


처음 키워보는 달팽이라

무얼 어떻게 해얄지 몰라

일일이 검색해가며 애지중지했지.


그런 나의 노력에도 너의 친구들은 몇개월동안

하나, 둘 떠나갔어.

그때도 나는 너무 속상했고

죄책감에 아팠어.


몰라. 왜 그런지는.

공주를 떠나보낸 것도 내 부모였는데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해.

모찌의 시력을 잃었을 때도 나는 유전적 질병임을 빤히 알고 있었음에도 죄책감에 몸서리쳤어.

그리고 애정하는 달팽이들이 떠났을 때도 나는 죄책감을 느꼈고, 또 슬펐어.


그럼에도 꿋꿋이 1년을 넘게 살아내고 있던 너를 보며 난 그와중에도 빛을 보고 애정을 꽃피웠지.


사실 마냥 이뻤던건 아냐.

밥을 챙기고, 흙을 갈고, 똥을 치우고, 물을 뿌려주는 것이

내가 먹고 살기 바쁠 때면 귀찮기도 했고

하루이틀 미루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살아있는 네게 감사했고

널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끼곤 했지.


1년 9개월 가득 채우고서

너는 죽었어.


딱딱하게 굳어버려 상추와 붙어버린 너의 몸.

억지로 상추와 떼어내었더니 그 부분이 단단히 굳어있었어.

물을 뿌려도 보고 달팽이집으로 말려들어간 네 몸을 꾸욱꾸욱 눌러도 보았지만

어떠한 미동도 없었고, 누르면 누르는대로 푹 꺼졌어.


아 원시티가 갔구나..




속상했어.

있을땐 몰랐는데

죽고나니 더 크게 느껴져.

네가 내게 이렇게 큰 존재였나?

마치 이별했을때처럼 가슴 한켠이 찡한 것이

너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래.


한참을 찔러도 보고

눌러도 보고

물을 뿌려도 봤지만

이미 죽은지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았어.

넌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어설픈 나의 심폐소생술도 당연히 먹히지 않았지.


그리고 팔땡이에게 소식을 알렸어.

네가 죽었다고.

팔땡이는 네가 아기천사가 되어 다음에는 사람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줄 알더라.

팔땡이는 두 손모아 네가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기도해주었어.


가끔 난 생각해.

내게 안전과 자유 중 극단의 선택만을 할 수 있는 상황이오면 무얼 선택할 것이냐고.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유라 답했어.

그리고 널 1년 9개월간 채집통에 가둬놓고 키운 내가 참 모순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나쁜 년 같기도 해.


나는 무슨 권리로 너를 화단에서 데리고 와 채집통에 가둬놓고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너의 평생을 구속했을까?

사실 너는 다른 곤충에게 잡아먹히더라도 자유를 바랐을지 모르는데.


모르겠어.

포유류의 뇌로 달팽이의 삶을 이해하기란 참 어렵거든.


그래서 어쩌면 이게 다 나의 망상일지 모르겠어.

사실 넌 미개한 작은 생명체였고,

어떠한 생각도 감정도 없었을지 모른다고.


근데 난 말야,

미개한 널 통해 많은걸 배웠고 얻었고 잃었고 느꼈어.


미개한 존재였을지라도

나의 세계에서 넌 큰 영향력을 지닌 아이였어.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내가

세상을 향해 너로 부터 경험한 것들을, 얻은 깨들음을 전할 날이 오겠지.


그러고보면 의미없는 존재란 없고

헛된 경험이란 없나봐.


그렇게 나는 훗날 나의 죽음까지도 그려봐.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까.

그리고 널 통해 얻은 답은 상당히 희망적이었어.


내가 죽어도 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이들이 그것을 행하며 살아갈것이고,

그렇게 나의 사상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썩은 내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것은 비가 되어 내려 멀리 퍼질 것이고,

자연이 되고 지구가 되고 우주가 될 것이니.

그렇게 나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어쩌면 죽음이란 것은

미개한 인간이란 존재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모순적이게도 죽음은 곧 영원의 시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돼.


난 다신 볼 수 없는 네가 슬프면서도 안타까워.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간 네가 땅을 봐도, 하늘을 봐도, 나무를 봐도, 구름을 봐도, 바다를 봐도 너의 조각조각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 한켠이 웅장해지기도 해.


그리고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널 통해 나는 또한번 깨달아가.

이별을 연습하고 죽음을 수용하는 법을 깨달아가.


1년 9개월간 나의 곁에 머물러 주어 고마워.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너의 죽음을 슬퍼할 이가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워 시작한 글이었지만

어찌보면 한 사람의 인생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대단한 달생을 산게 아닐까.


원시티야 고마웠어.

널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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