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사회에서 경쟁과 비교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2)
그럼 나는 아이에게 '왜' 뉴질랜드와 같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 안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던진 것 같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매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졌다거나,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결혼하였다거나,
돈 걱정 크게 없이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거나,
남편과 나 둘 다 고학력자라는
그러한 외부에 보여지는 모습이나 스펙에 대한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보여지는 것과는 또 다른 실체들이 있다. 보여지는게 다가 아니다.)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소위 말하는 지잡대를 졸업한다거나,
고졸신분으로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한다거나,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한 환경에서 지내게 된다해도
나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 요인들이 아니라, 내적 요인에 의한 것임을 지금은 체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맞벌이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빠 나를 학원 뺑뺑이를 돌리며 키웠다.
단순히 부모가 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끼리 혼자 둘 수 없어서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는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있었으나 가정 형편상 대학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내게 투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첫째인 내게 기대가 커서 나를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며 동생에 비해 많은 것들을 시켜왔다.
단순히 사교육 뺑뺑이만 돌았다면 또 어땠을진 모르겠다.
사교육 뺑뺑이에 더해 가정 환경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으니 매일 같이 부부싸움이 이어졌고,
매일 돈돈거리는 엄마와, 매일 밖으로 나돌며 가정에는 무신경한 아빠 사이에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경험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라고 하니 당연히 집중이 되지 않았고,
초등 시절 사교육 시장에서 꾸역꾸역 버텨오다 중학교 때 번아웃이 오며 공부에서 아예 손을 놓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일탈과 비행이 시작됐다.
한국 사회에서는 학창 시절의 어느 한 부분에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이후 공부는 따라잡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크게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중학생이 공부에 손놓고 반항하는 것이 인생에서 도태되고 있다고 보여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있어 중학교 시기는 가장 즐거웠고 행복했고 만족했던 시기였다.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공부를 손에서 놓고, 나쁜 행동이었지만 반항도, 일탈도 해보고,
부모와 학교, 사회에 맞서 나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며 싸워보기도 했던 시기였다.
나는 지금도 이때가 나를 살린 시기였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회에서 바라보는 나는 달랐다.
사회에서는 이제 내 인생이 망했다라는 비언어적 메세지를 계속해서 던졌다.
학교 교사들은 나와, 그리고 우리 집단을 벌레보듯 했고,
수업시간에 떠들거면 차라리 자라고 하며 내가 수업 시간에 자든, 빠지든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교사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동생의 학원 교사는 동생이 있는 반에서 수업시간에 나를 언급하며
"00이 누나처럼 인생 망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부모님조차 내가 공장에 가서 자기 인생 책임질 정도의 돈만 벌며 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모두가 내 인생이 망했다는 시선을 던지며, 나를 평가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대학은 가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대로 나는 공장에 갔다.
그들의 생각대로 나는 사회에 도태된 것처럼 보였다.
한국 사회에서 제시하는 속도와 방향대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땐 나도 내 인생이 망한 것 같았다.
열아홉 말, 공장에 들어가며 군대에 끌려가는 군인마냥,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느껴져 울기도 했다.
그러한 사회적 시선 속에서의 나는 그저 낙오자이자 루저였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며 사회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나는 뒤늦게 대학을 입학하고 또 대학원을 졸업하며 결국 꿈을 이루었다.
이전까지만해도 나는 내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끈기가 없어 무엇하나 진득허니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동기로 시작한 공부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선택한 공부는 남들보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치고 나갈 수 있었고,
엄청난 몰입을 경험하며 실제로 이것은 성취로 이어졌다.
처음으로 성적 장학금이라는 것도 받아보고,
성적 우수상을 받으며 졸업을 했다.
동기들 중 유일하게 상담사 자격을 취득하며 졸업을 할 수 있었고,
내게 누구보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야생마같은 모습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해서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엄청난 몰입력을 보이며 그저 즐겁게 행복하게 그 과정을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나는 자기결정성, 주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적으로 깨달았다.
엄마는 내게 사교육을 강요하였지만 사실 사교육을 제외하고는 내게 자율성을 많이 부과했었다.
내가 엄마로부터 언어적인 것 뿐만 아니라 비언어적으로 받아왔던 메세지는
'니 인생이니까 니가 결정하는거지 뭐.
니가 원한다면 해봐.
니가 나보다 젊고 많이 알텐데 당연히 잘 하겠지.
니가 그냥 선택하진 않았을거고, 분명히 잘 알아봤겠지, 이유가 있겠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사교육을 제외하고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늘 그것을 선택하는 삶에 익숙했다.
아빠는 가정은 신경쓰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고,
엄마 또한 맞벌이로 바빴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방치되는 날들도 많았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는 독이 되기도 했지만, 또 득이 되기도 했던 환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많은 자율성이 주어졌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러한 양육환경과 부모님의 메세지를 받으며 자라왔고,
또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엄청난 몰입감과 재미, 성취를 느끼면서
주체성과 자기결정성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내 석사 논문의 주제도 '자기결정성'에 대한 것이었고,
그만큼 내가 자기결정성, 주체성, 자율성, 독립심, 자립심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논문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나는 아이에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이에게 전하고자하는 메세지는
'내 삶은 내가 선택했고 나는 매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나의 삶만이 정답은 아니고, 너 역시 나의 삶을 따라 살아갈 필요는 없어.
너는 너의 삶을 찾아. 니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니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넌 무얼할 때 행복한지, 너를 가장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그건 니가 천천히 찾아가며 선택할 수 있어.'
라는 것 들이었다.
현재의 나는 청소부로 살아가든, 설거지를 하며 살아가든, 공장에서 일을 하든,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즐겁게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의 청소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나의 설거지가 타인을 어떻게 이롭게 하는지,
공장에서 내가 만든 물건이 얼마나 가치로운지
이제 나는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외부의 환경은 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날 무어라 평가하든 내가 선택한 삶, 내가 만족한 삶이어야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의 장점만을 잘 뽑아먹으며(?) 살고 있다.
빠르고 자극적이고 바쁜 한국 사회는 나의 폭발적 에너지를 분출하기 좋았다.
강하게 몰입하고 빠르게 치고 나가는 내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한국 사회가 과연 내가 아이에게 주고 싶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에는 부합하는 사회인가에 대한 질문이 계속해서 쏟아졌던 것 같다.
이미 내가 아이에게 선택지를 줄 때마다 주변에서는 아니꼬운 시선들이 쏟아졌으니 말이다.
때론 걱정스럽게, 때론 불안하게, 또 때론 유난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 입을 뗀다.
"한국 사회에 맞게 키워야 아이가 도태되지 않죠."
한국 사회는 아이에게 뿐 아니라 이미 나에게도 양육에 대한 선택에 존중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스스로의 선택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계속해서 해외 육아를 갈망하게 만든 요인이었음을 뉴질랜드에 와서 깨달았다.
뉴질랜드에서는 각자의 삶이 어떠한 방식이든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다.
다민족, 다문화, 다인종 국가에서 흔히들 살아가는 방식이지 싶다.
뉴질랜드 뿐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경험했던 것들이니
나와 다른 삶을 살아나간다고 해서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삶을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각자의 삶을 존중한다.
교육부터가 이미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우선시 되고 있다.
사실 뉴질랜드에서 5, 6학년임에도 한 자리 수 더하기, 곱하기를 배워올 때면 나 역시 걱정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지내다 한국 돌아가면 학습적으로 정말 많이 뒤쳐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뉴질랜드의 교육 이게 맞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뉴질랜드 교육의 목적은 달랐다.
내가 찾고 있던
'너는 너만의 속도대로, 방향대로, 니가 선택한 삶을 살아나갈 수 있어.
어떤 것도 정답은 없어. 너는 어떤 때에 행복하니?'
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있었다.
초등시절 사교육에 내몰렸던 나와 달리,
중학교시절 반항을 하며 사회적으로 도태되었다, 쟤는 이제 인생 망했구나 하는 평가 없이,
공장을 다니는 내게 사회적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한 하층 일자리라는 시선 없이,
뒤늦게 공부에 뛰어들며 느끼는 불안감 없이
아이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선택을 하든 외부의 평가가 따르지 않고 존중받는 삶을 원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결국은 내가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환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