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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Dec 25. 2020

애착의 대물림

안정애착에서 대실패를 거두고 말았다.


나는 부모님과의 불안정애착, 그 중에서도 회피형불안정애착이라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항상 불안정애착으로인한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늘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 삶이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서 내 새끼에게만은 절대 그러한 결핍을 물려주지 않아야 겠다 생각했고 육아를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애착, 그리고 아이의 정서였다.
하지만 발달검사를 할때마다 정서가 늘 평균이하를 맴돌았고 불안정애착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어왔다.
아이가 다니던 첫 기관에서 원장선생님은 "아이들한테서 나타나는 경이로운 웃음, 큰 표정변화가 얘한테는 없어. 좋은지 싫은지 표정에 티가 안나. 애답지 않아." 라는 말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그 말이 얄궂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늘 아이에 대한 어떠한 피드백이든 감사히 받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대물림하기 싫었던 불안정애착을 그대로 대물림했고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안정애착에서 대실패를 거두고 말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물론 크리스마스날 선물을 손수 준비해 주시던 부모님, 함께 놀이공원 갔던 기억, 아플때 살신성인으로 밤새 간호해주던 엄마, 함께 운동회에 참여했던 기억, 반 친구들을 초대해 최고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등 행복한 순간도 많았겠지만 뭉뚱그려 이분법적으로 굳이 정의해보자면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웠다.


좋게 말해 순진했던 아빠는 인간관계에서 잦은 사기를 당해왔고 사업에서도 여러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그렇게 가정의 실질적 가장은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늘 탐탁찮게 여겼고 갈수록 아빠를 하대하고 무시하는 정도가 심해졌다. 그렇게 부부싸움은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어린시절을 기억하면 지겹게도 싸워대던 엄마와 아빠, 늘 가난에 허덕이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있으셨기에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갔지만 아빠 대신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과 아빠를 향한 경멸은 점점 커져만 갔다.

기억도 안나는 어린시절, 4~5살때까지 나는 외할머니 손에 키워졌다고 한다. 어느 날 아빠,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을땐 부모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보기도 전 남동생의 존재가 생겼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양육자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라이벌까지 더해진 것이었다. 나는 늘 42개월이나 차이가 나는 남동생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꼈고 자라는 내내 동생이라는 존재가 너무 미웠다.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나를 태어나게 할 것이었으면 동생이라도 낳지 말던지, 왜 동생까지 낳아 이 가난에서 입 하나를 더 늘렸는지 부모를 원망했고, 왜 누나라 다 참아야 하고, 왜 누나로서 동생을 챙겨야 하는지, 왜 동생때문에 내가 혼나고 있는건지 이해도 안가고 억울한것 투성이었다.
자라는 내내 나는 동생을 괴롭혔고 동생의 위에서 군림했다.

엄마와 아빠는 밤마다 싸워댔다. 늘 싸우는 소리에 깨서 큰 일이라도 날까 두려웠고 밤마다 이불로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억지로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당시 부부싸움의 원인이 나라는 생각도 했었고 실제 싸움의 내용 중엔 육아문제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어린 마음에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안정감을 느껴야 할 가정에서 잦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늘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가정에서의 감정상태는 긴장과 불안이 베이스였다. 이때부터 불안이 만성이 되어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당시엔 그렇게 밉던 동생도 성인이 되어 돌아보니 같은 환경에서, 같은 불안에 노출되어 자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엄마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늘 바빴다. 학교를 갔다 오면 집은 늘 텅 비어 있었고,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까진 텅 빈 집에 하교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집에서 반겨주는 엄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왜 우리 엄만 늘 일을 해야만 하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바쁘니 3분 조리식품과 같은 인스턴트 식품들이 선반 한켠엔 늘 쌓여 있었다.

늘 몸을 쓰던 일을 하시던 엄마는 매일을 피곤해하고 힘들어 했다. 신체적으로 힘드니 퇴근해 와서도 신경질내고 짜증내는 것은 일상이었고, 나는 늘 왜 혼나는지도 모른채 엄마에게 혼나고 있었다. 이게 혼날 일인가? 내가 왜 혼나는거지? 난 잘못한게 없는 것 같은데?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입밖으로 말을 꺼내는 순간 말대꾸한다며 더욱 혼이 나곤 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결코 표현할 수 없었고 가정에서 거절과 거부적 반응을 자주 겪고 자란 탓에 내면엔 반사회적인 성향과 분노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체벌도 일상이었다. 우리 시대엔 맞으며 자란 친구들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아직도 충격적인 것은 9살에 팬티빼고 쫄딱 벗겨 집밖으로 쫓겨 났던 기억은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고 옆집 아저씨와 마주쳤던 그때의 수치심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나눠 준 우유를 안먹고 가방에 넣어왔다 그대로 터져버려 교과서가 다 젖어 맞았고, 어느 날은 숙제를 미뤘다는 이유로 엄마는 교과서를 죄다 찢어 버리고 내 쫓으려 했다. 체벌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물론 엄마도 참고 참다 터졌을 수도 있겠지만 같은 이유라도 어느 날은 혼나지 않았고, 어느 날은 심하게 맞기도 했기에 늘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엄마가 무서웠고 불안했다.
불안정애착은 비일관적 양육태도에서 많이 형성된다고 하기에 이것을 절대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기분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비일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나 역시 나의 엄마를 똑 닮아 있었다.

그에 반해 아빠는 반대로 방임형이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기에 육아는 뒷전이고 자신의 취미생활에 몰두해 있었다. 그렇게 사기를 당하고, 사업을 말아 먹으면서도 취미생활은 꼭 챙겨 다녔고 가정에 생활비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본인의 취미생활비는 우선적으로 챙겼다. 늘 가정보다는 바깥활동이 우선이었기에 방치되고 있는 느낌은 아이였던 내게도 그대로 전달되었고 그로인해 엄마가 모든 것을 떠안고 힘들게 우리를 양육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우리를 떠맡게 된 날도 취미생활인 테니스를 치러갔고 아직 아기인 동생은 땡볕에  방치된채 기저귀에 짓이겨진 대변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아빠는 우리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던 듯 했다.

엄마는 그렇게 비일관적이게 우리를 혼냈어도 진심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었지만 아빠에게는 애정이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에게 쌓인 부정적 기억이 훨씬 많고 훨씬 깊은 수준의 것들이지만 공개적으로 쓸 만큼의 용기가 없어 여기에서 마치겠다.

중요한 것은 나는 아빠라는 존재가 차라리 없었으면, 엄마가 아빠와 이혼하고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으면 이라고 간절히 바래왔다.
미움을 넘어선 혐오와 경멸이었으나 한편으론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빠에 대한 안쓰러움에 양가적 감정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그것은 차마 부녀 관계를 끊어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엔 나와 같은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곤 하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고 육아서적을 보고 공부하면서 왜 우리 부모는 나를 이렇게 밖에 키우지 못했나, 그럴거면 나를 왜 낳았나 하는 원망 뿐이었다.
가장 속상했던 것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내 딸에게 내가 겪은 비일관적이고 신경질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불안정애착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다는 것, 그것에서 벗어나려 아무리 발악하고 몸부림쳐봐도 더욱더 깊이 침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 부모에게서 받은 양육방식은, 불안정애착은 대물림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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