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빈 Dec 15. 2020

화가 나면 화를 내세요.

아이가 32개월즈음이었다.

당시의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아이에게 잦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었고 거기에 뒤따르는 죄책감으로 인해 죽을만큼 힘들었다. 쿨하게 '그래, 나 화냈다. 뭐!' 하는 엄마들도 많은데 나는 화를 내고 나면, 아니 조금의 짜증을 내기라도 하면 곧이어 뒤따르는 죄책감이란 감정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엄마라면 아이에게 절대 부정적 감정을 표현해서도, 가져서도 안되며 나의 의지로 인해 태어난 아이이기에 엄마로서 행복하게만 만들어줘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를 내고 나면 하루종일 짜증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감정에 먹혀버린 느낌이 들었고, 나를 위해서가 아닌 아이를 위해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 

잘못된 양육태도로 인해 아이 역시 위축된 모습이 보였고 크게 웃거나 우는 등 감정표현의 강도도 약했다. 종종 손톱을 물어뜯거나 한숨을 자주 내쉬는 모습도 보였고 이런 불안정한 엄마 밑에서 크다가는 아이가 정말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이에게 화를 내놓고 갑자기 미칠듯한 죄책감과 부정적 감정이 휘몰아쳐 상담센터로 급하게 전화를 하고 예약도 없이 불쑥 찾아간 곳이었다. 

20분의 접수면접이 있었고 왜 상담센터를 찾았는지, 이전 상담경험이 있었지만 어떠한 연유로 상담을 이어나가지 않았는지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작 20분이었지만 상담사의 따뜻하고 안정된 모습이 좋았고,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져 곧바로 그 상담사와 상담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처음 상담센터를 찾을때 사람들은 많은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내 감정도, 문제도 스스로 다루지 못해 남의 도움을 받으러 와야 한다는 패배감에서부터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하는 부끄러움과 수치심, 처음 보는 타인에게 나의 취약점을 모두 드러내야 한다는 불안감, 비밀보장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 비용에 대한 압박, 상담을 한다고 해서 나의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의심.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상담센터나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으며 누구나 마음에 상처는 있고, 그것의 정도 차이로 인해 센터의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해외에서는 감기처럼 주기적으로 심리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던가.

그러한 의심과 불안이 없었기에 기대와 희망, 그리고 약간의 긴장상태에서 상담은 시작이 되었다.

 

상담사는 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었고, 내가 상담을 주도하여 이끌어 가도록 서포트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적재적소에 짧지만 강렬한 공감을 취해주었고, 따뜻한 태도로 나를 판단없이 수용해 주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학력, 경제상황, 어린시절 원가족과의 관계, 풀지 못한 원가족과의 엉켜있는 감정들, 남편의 학력, 성격, 어린시절, 더해서는 나의 부모의 어린시절까지 모든 정보를 풀어놓게 되었다.

상담사는 3회기까지 나를 파악하는 시간이 될거라 했고 나를 알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거라 했는데 그러한 과정에는 나의 약점과 취약점까지, 내가 수치스럽게 느끼던 모든 부분들을 공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지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속에 꽉 막힌 무언가가 터질듯이 용솟음쳤지만 어릴적부터 억눌려 있던(부모님의 처벌로 인해 억눌러야만 했던) 감정은 차마 시원하게 토해내지 못했다. 눈물이라도 한바가지 쏟고나면 시원해질것만 같았지만 감정을 억압하는데 익숙해져버린 나는 눈물을 흘리는 법도 잊은 듯 했다. 울고 싶지만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어이없고도 한심한 상황이었고 꼭 체한 것과 같은 느낌에 상담 내내 속이 꽉 막힌듯 답답했다.



이전 경험했던 상담센터들은 아동심리상담센터였어서 그런지 대부분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는 법'에 초점맞춰 설명을 해주었다면 이 곳에서의 과제는 '화가 나면 화를 내세요.' 였다.

읭? 아이에게 화를 내는 내 모습을 견디지 못해 상담을 받으러 왔는데 화를 내라니요? 의아했다.


상담사의 말에 따르면 화라는 것은 결코 쓸모없는 감정이 아니고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진된 감정이라고 한다. 화뿐만 아니라 어떠한 감정이라도,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아무런 의미와 효과가 없는 감정은 없으며 분노 역시 그에 따른 효과가 분명히 있다고 한다. 나 스스로 화라는 감정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하고 참으려 하니 내가 나를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게 되는 것이고 감정과 머리의 불일치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1회기 과제는 화가 나면 자연스럽게 화를 낼 것, 하지만 내 자아가 화를 참으려하면 즉시 화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참아도 된다고 했고 대신 화가 나는 즉시 머리로 인지할 것을 강조했다.


의문 투성이의 과제였지만 상담사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분노가 아니더라도 조금의 부정적 감정이나 짜증이 올라와도 곧바로 캐치하여 머리로 인지하였고 아이에게 "엄마 화났어." 라고 화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기록하며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났다는 엄마의 말에 아이가 주눅드는 모습을 보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이 정도 화는 참을 수 있는 화인데 굳이 아이에게 표현을 해서 상처를 줘야 하나 싶었지만 일주일 후인 다음 상담에 가기까지 화를 표현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그 강도가 점차적으로 줄어 나갔다.


돌이켜보면 감정을 참지 않으니 그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짜증 정도에서 "화났어."라는 말로 분출하며 감정이 해소가 된 것 같았다. 화났다는 나의 신호를 아이가 받아들이고 행동을 자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가벼이 화를 표현하는 동안 나에겐 감정의 해소가, 아이에겐 일종의 신호가, 그리고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일관성을 보인 것이다.

감정에서 분리되어 한걸음 떨어져 감정을 인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첫회기 과제는 감정을 말로서 표현하여 머리로 인지하도록 연습하는 과정이었다. 


상담사는 엄마의 화도 아이가 계속해서 겪으며 대응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갈 수 있기에 절대 화가 나는 것을 부정하거나 피하지 말라며 대신 건강하게 화를 표현하는 법을 익혀 나가자고 했다.




1회기 상담에서는 누군가에게 판단없이 수용되고 있다는 느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부정적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상담사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조심스레 지적하였기에 상담의 기대와 희망이 더욱 고취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심리상담사라고 모두가 다 자질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