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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Oct 10. 2022

자유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나는 꽤나 해외여행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여행이 주는 리프레쉬가 좋았고, 낯선 해외라는 곳에서 주는 자극이 좋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SNS에 올릴 수 많은 허세와 조금은 시기어린 질투와 부러움의 댓글들, 그로 인해 느껴지는 우월감 역시 좋았다.

성인이 되어 나의 지출 중 많은 부분은 해외여행에 쓰였다. 1년에 적어도 한 번, 많을 땐 세 번씩도 해외를 나갔고, 캐나다에서 나름 공부까지 하고 왔으니 여권에는 수많은 도장이 찍혔고 그것은 나의 스펙 마냥 쌓여갔다.

그리고 3년전,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가 막 발생한 초기만 해도 나는 필리핀 세부에서 여행 중에 있었다.
그리고 세부에서 돌아온 나는 그새 180도 변한 심상찮은 국내외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해외에 다녀와 병치레를 하던 것이 국룰이었던 만 세살의 딸은 세부여행 후에도 고열에 시달렸고, 코로나로 철저히 방어적이었던 국내 병원들에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마치 죄인이 된듯 치료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여행은 3년간 강제 금지가 되었고, 그 사이 나는 해외여행이 주는 리프레쉬를 잊지 못해 간절히 그리워하길 반복했다.
"제발 해외여행 좀 다녀 왔음 좋겠다."
해외여행을 못간지 1년여즈음 되었을 땐, 나는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해외여행에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렇게 코로나로 인해 여행은 3년간 강제 스탑 상태였다.

그리고 두달 전 여름,
우리는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여행이란 것을 했다.
무려 국내여행이었다.
항상 해외만을 선호했던 나는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제주를 선택했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제주에서 자의 반 타의 반인 여행을 하게 되었다.

제주에서의 여행은 지금껏 하던 여행과는 달랐다.
해외에 나가 일정에 좇기며 유명 관광지를 찾아 다니거나, 값비싼 숙소에 묵으며 리조트콕을 즐긴다거나, 블로그에서 소개하는 맛집탐방에 나선다거나, 매일 예쁜 화장과 예쁜 옷으로 사진 남기기에 급급한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제주에 있는 8일간 매일 같은 옷을 입고, 화장기없는 얼굴에 마치 현지인처럼 슬리퍼나 질질 끌고 다니며 맛집과 관광지를 멀리 했다.

그날 그날 이끌리는 곳으로 발길이 닿으면 그 곳에서 하루종일 놀았고,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면 손빨래로 대충 입었던 옷을 빨아 널고, 또 그 옷을 다음 날 입고 그렇게 8일을 지냈다.
사진은 매일 비슷한 장소, 같은 옷, 칙칙한 맨 얼굴에,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그 어느때보다 표정만은 밝았다.
억지로 지어내는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우리는 성수기 요금으로 13만원 짜리 숙소에 묵었다. 인터넷에서는 펜션이라 불리우나 막상 도착해보니 민박이라는 간판이 붙은 좁고 허름한 곳이었다.
비수기땐 7만원이라니, 사실 모텔이나 별반 다름 없는 시설과 룸컨디션이었다.

늘 예쁘게 치장하고 해외의 유명한 관광지, 값비싼 숙소, 맛집탐방을 즐기던 내가 이 곳에서는 그 모든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을 누리고 있었다.

그래도 관종의 피는 속일 수 없었던지 SNS는 여전히 활발했다.
하지만 이전의 허세와 우월감, 타인의 질투어린 시선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허름한 내 모습을, 싸구려 민박을, 펜션에서 대충 끓인 어묵탕과 볶음밥을 올려 댔고 타인의 댓글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제주에서 온전히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과, 타인과의 연결, 사회적 지위, 현실에서의 위치, 경제적 상황, 외적 가치 모든 것을 내려둔채 나는 제주에 와 있었다.
그 자유로움에 한껏 만족한 나는 SNS에 나의 자유를 기록하고 싶었다.
나 지금 화장 안했어요.
나 지금 일주일째 같은 옷이에요.
나 13만원 짜리 민박에 묵어요. 비수기는 무려 7만원이라구요.
매일 그냥 발길이 이끄는 대로 나가 놀아요.
밥은 대충 어묵탕이나 끓여 먹는다구요.
저는 지금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있어요.

그렇게 제주에서 자유를 양껏 즐기고 온 나는 다시금 지금껏 내가 추구했던 여행이 무언가에 대한 고뇌에 빠졌다.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행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렇게 모든 것에서 벗어난 열악하고도 또 허름한 나의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풍요롭고 풍성한 자유를 느끼게 만들었다.
무언가에 엮여 있지 않으면 오히려 더 풍족해질 수 있음을.
무소유가 사실은 내면을 가득 채우는 풀소유인 것을.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고,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며칠 전, 20년 지기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몇년 전과 다르게 너무나 성장해 있어.
인격적 성숙. 그거 말곤 설명할 방법이 없어.

그리고 나는 답했다.
성숙은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내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거야.
난 왼쪽을 향해 가던 사람이었는데,
육아와 상담공부를 기점으로
완전히 오른쪽으로 돌아서 버렸거든.
그렇게 방향을 틀어 버렸지.

여전히 내가 누군가 보다 더 성숙하다 라는 어리석은 자만은 하지 않는다.
이전의 나보다 더 성숙해졌다는 오만함도 없다.

다만 인생에 방향점이 확실히 달라진건 느낀다.
나는 더이상 값비싼 해외여행과 물질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론 극단으로 해외여행을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국내에서 하지 못한, 보지 못한, 느끼지 못한 많은 것들이 그 곳에 담겨 있을 테니.
나는 그것들을 여전히 탐닉하고 갈망할 때도 있다.

이번 겨울,
나는 해외여행을 다시 한번 고민하며 생각에 잠겼다.
여행을 고민하던 나는 그 곳이 어떤 나라든 중요치 않고 그저 값비싼 리조트에 가서, 호사를 누리고 오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이것이 틀리거나 나쁜 것이라곤 생각진 않는다.

하지만 해외를 다녀오면 무조건 아픈 아이의 리스크를 짊어지고 가는 것에 대해 무엇을 취하고 버려얄지.
혹은 바라던 자유를 추구하고 올 수 있을지.
나는 좀 더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바란다.
여행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내려놓고 무소유가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있길.
어쩌면 이미 그 길을 조금은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기에 응당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인간이 만든 사회적, 문화적 산물들에 오히려 속박되어
그 자유를 잃고 있진 않은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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