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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Oct 11. 2022

나는 내가 참 좋다.

집단상담 후 두달 정도를 아팠다.
몸도 마음도.

어쩌면 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성격을 집단상담에서 타인으로부터 부정당했다.
나의 성격이 거부감이 들고 불편하다는 피드백이 있었고, 이후 한동안 나는 참 많이도 아팠다.
속상함은 속상함이고, 그와 별개로 나의 문제를 직면하고, 받아들일건 받아들이고 개선할건 개선하자는 생각으로 나의 성격이 정말 문제인가,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는가 많은 고뇌를 했다.

그렇게 나의 성격에 의심을 품는 순간, 나는 떳떳하지 못했다.
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나의 직설적인 모습을, 솔직한 모습을, 열정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조심하는데 급급했다.
나의 성격이 잘못된 것이며,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로 인해 나의 성격을 숨기기 급급했던 두달여의 시간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날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은 '왜 눈치를 보냐'며 생전 처음 들어보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이고 제 멋대로라는 평가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눈치를 본다는 피드백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본래의 성격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타인에게 썩 좋은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

아이러니했다.
나의 성격이 문제라는 피드백을 받아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임에도 그것마저 문제라는 피드백을 받다니.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성격 자체의 문제가 아님을.
내 성격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그 집단원이 나를 향한 투사를 보였던 것일 수 있음을.

그녀는 그녀가 갖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모습을 본인의 친구를 통해 바라 볼때면 불편한 감정이 올라온다고 했고, 나를 보면 그 친구가 떠올라 거부감이 든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한심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을 가진 내게 거부감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경험한 과거가 있기에 무엇을 바라보든 자신의 주관적 평가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설령 사람일지라도.

어떤 이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실제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또 그 자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과거 경험에 빗대어 주관적으로 그 행동을 해석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한 것이 아니므로 내 성격이 모든 이들을 만족 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나는 내게 불편함을 느낀 그녀를 마치 모든 사람이 그리 느낀듯 일반화하여 내 성격에 의심을 품어 버렸다.
누군가에겐 불편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지 모르는 내 성격을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집단원들의 성격이 모두 마음에 쏙 들진 않았다. 심지어 리더의 성격마저도.
나 역시 당신의 성격에 대해 피드백을 준다면 더한 피드백도 줄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하지 않았다. 상처 줄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녀의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나와 맞지 않았을 뿐, 누군가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일 수 있을테니.

사실 개인적으로는 집단상담이란 것이 낯설고 협소한 장소에 많은 인원을 때려넣고 장기간의 과업으로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어 심리적 역동이 일어나게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마치 육아처럼.

육아를 할때 나는 나의 최악의 모습을 바라본다.
나란 사람의 바닥을 직면하게 된다.
못자고, 못먹고, 못쉬고, 자유를 억압당한 미칠 둣한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어진 엄마라는 존재는 악마가 되고 마녀가 된다.
성경에서는 타락한 천사가 악마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엄마라는 존재 역시 나는 세상의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아름다움과 또 가장 추악한 모습을 담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날 것 그대로의 추악함을 드러내곤 한다.
그리고 나는 집단상담 역시 육아와 마찬가지로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어 나의 그림자를 가장 짙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모습보다 집단상담에서 더 긴장되고 불안한 모습으로 나의 성격의 그림자가 더욱 극단적으로 발현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가장 극단의 그림자를 보고서 사람들은 내게 좋지 못한 피드백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상처를 받았다.

상담사는 내게 집단상담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물었다.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바라봐주길 바랐다고 대답했다.

칼 로저스의 상담을 보면 실상 로저스는 별 말이 없다.
잘 모르는 이가 보면 이게 상담이란 말이야? 거저 돈 버네 싶을 정도로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고, 경청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로저스의 그러한 조용한 경청을 집단원들에게 바랐다.
아무런 판단도, 조언도, 심지어는 공감도 없이
그저 나를 조용히 들어주길 바랐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길 바란 것이었다.
네가 문제다, 네가 나쁘다 라는 어떠한 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주길 바랐었다.

하지만 나의 그림자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긴 커녕, 누군가에게 불편감을 자아내고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그것은 나의 가장 극단의 모습이었음을,
사회에서의 나는 그 정도의 극단을 보이는 사람이 아님을.

물론 사회에서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극단의 모습이 비추어지기도 하겠지만, 그것만 경계하고 조심하면 되었지 그러한 나의 본질마저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불편해 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의
미해결된 문제가 내게 투사되었을 수 있음을.

두달여간 많이도 혼란스러웠지만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나란 사람이 누군가에겐 매력으로, 누군가에겐 불편감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누가 날 어찌 평가하든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당당하면 된다.

이렇게 고민하는 내가 좋다.
그녀를 위해, 타인을 위해 고민한 내가 좋다.
솔직하고 용기있고 당당한 내가 좋다.
결핍이 있기에 더욱 짙은 향기를 낼 수 있는 내가 좋다.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내가 좋다.
나는 내가 참 좋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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