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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Oct 12. 2022

당신은 언제나 타당하다.

팔땡아, 타당한게 뭐야?
응~ 타당한건 옳다는거야~
모든 사람의 마음은 타당한거야?
응 사람들의 마음은 다 타당해.
네가 화내고 짜증내도 그 마음은 타당한거야?
응 내 마음은 항상 타당해.

타당화.
상담장면에가면 상담사가 개인에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필수적인 작업이다.
네가 느낀 감정은 모두 타당하다.
너란 사람은 타당하다.
네 존재는 타당하다.
네가 옳다.

상담공부를 시작한 후로 나는 아이에게 타당화를 실천하려고 늘 노력한다.
아이가 아무리 짜증내고 화를 내도 네 감정은 전혀 문제없어. 네 감정이 화가 나는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거야. 네 감정은 늘 옳아. 를 이야기했고,
아이의 감정이 너무 버거워 수용이 힘들때 조차도 네 감정이 문제라서 잘못이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아이는 자신의 감정에 의문을 품지 않고 자라고 있다.
화가 나도, 짜증이 나도 자신의 감정은 늘 옳음을 인지하고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타당화해주는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
네 감정은 옳아. 네가 그러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거야. 정말 속상하겠다.
어떠한 공감도, 타당함도 인정받지 못했다.

먹고 살기 바빴던 부모님은 자식들의 감정은 커녕 당신들의 감정조차 돌볼 여력이 없으셨다.
내가 부정적 감정을 내비칠때면 그들은 나를 혼내기 급급했고, 그렇게 나는 내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며 자라났다.

그렇게 성인이 된 나는 부정적 감정이 따를 때면 감정을 느끼지 않는 선택을 했다. 인지적으로 처리를 거쳐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지는 일.
마치 감정이 없는것 처럼 인지적으로 처리해버리면 상황이 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리원칙에 입각해 원칙에서 벗어났으니, 내 감정 역시 동요를 일으키면 틀린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날 타당화해준 적이 없으니 스스로를 타당화할 줄 몰랐고, 그저 로봇처럼 딱딱하게 원리원칙만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타당화 받아본 적이 없으니 나는 타인의 공감도 마냥 불편했다. 내게 공감을 해주는 이의 공감을 있는 그대로 받지 못했다.
"진짜 속상했겠다."
라고 공감을 하는 지인에게 "음.. 속상하다기 보다는.." 이라며 다른 답을 외쳤고,
"진짜 화났겠다."
라는 공감에는 "화도 화지만.." 이라며 꼭 뒤에 다른 정답이 있음을 덧붙였다.

그냥 맞아. 나 힘들었어. 속상했어. 화났어.
하면 될 것을 공감받아본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감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타당화 받아본 적이 없으니,
나 스스로 나의 감정을 타당화해주지 못했다.
슬픈 감정이 올라오면 애써 더 밝은 척 했고,
속상함이 몰려오면 애둘러 분노로서 표현했다.
우울함이 몰려올때면 인지적으로 오목조목 따져가며 우울을 느끼는 나를 채찍질 했다.

어떤 이들은 타당화를 받아보지 못해, 자신의 존재까지도 타당화시키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예민한 기질인 아이는 신생아때부터 쉴 새없이 짜증을 냈다.
한번도 아이를 키워본 적 없으니 짜증이 모든 아이들의 베이스 감정인 줄 알았을 정도로 아이는 짜증이 심했다.
아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짜증으로 표현했고, 엎어놓든, 뒤집어놓든, 안아주든, 돌아다니든 쉽게 짜증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예민한 아이의 특성상 어떠한 불편감을 강하게 느꼈고 그 불편한 감정 역시 강하게 표현해 냈다.

그런 아이의 잦은 부정적 감정 표현에 나 역시 점점 화가 났다.
아이가 돌즈음 되었을때부터 나는 부정적 감정을 계속해서 표출하는 아이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고, 또 부정적 감정을 표출해 버린 자신에게 화가 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인지로도 눌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튀어 오르는 부정적 감정에 나는  점점 우울해져 갔고 결국 산후우울증에 빠졌다.

살아오며 나의 존재를 타당화 받는 순간은, 그저 가시적으로 눈에 띄는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순간 뿐이었다. 각종대회에서 받아온 상장, 학교 책자에 크게 실린 나의 글, 전교부회장이라는 타이틀, '수'로 가득찬 성적표.
그런 것들이 아니면 더이상 나는 타당화받지 못했고 어쩌면 나의 인정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까진 그냥저냥 앞서가던 아이였다.
날 타당화해주는,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은 가시적인 결과물들이었으니.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며 날 증명해주는 결과들을 더이상 얻기가 어려워졌고, 그로인해 내 존재 역시 더이상 타당하지 못해져 버렸다.

수용, 그래도 일상에서 어느정도 들어본 말이다.
육아서적에서는 아이를 수용하라 말한다.
하지만 수용받아보지 못한 이들은 수용의 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수용은 쉽게 말해 받아들임이라고 한다.
받아들인다는게 뭐지? 내겐 그저 모호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이를 수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상담을 다니게 되었다.
상담사는 날더러 계속해서 네가 옳다고 해주었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옳다. 네가 다 옳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네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한 타당화는 그녀가 날 온전히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 마저도 그녀는 다 옳다고 한다.
남들이 불편해하는 내 성격의 일부분 마저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발전시킨 나의 생존전략이기에 전적으로 인정한다 말한다.
내가 잘 못 되지 않았다고,
내가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그리 느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 감정은 타당한 것이라고,
내 존재는 타당한 것이라고.

그저 공허한 옳다가 아니었다.
그 말에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타당화가 선행되어야 수용이 가능하다.
수용이 선행되어야 공감이 가능하다.

날 전적으로 믿고 옳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어야 나의 존재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나를 타당화하고, 어떠한 조건 없이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어제도 학원을 가고 싶지 않다고 한시간을 울었다.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는 학교를 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에게 말한다.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은 틀리지 않았다고.
네가 그리 느꼈다면 그것은 정답이라고.

학원에 가기 싫은 마음,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마음,
속상함, 슬픔, 불안함
모든 너의 감정을 존중한다고.

아이의 감정은 쉬이 그쳐지진 않았다.
속상함이 오래 갔지만
그럼에도 엄마가 자신을 타당하다 말해주고, 이해해주고, 수용해주고, 공감해주는 데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는 종종 말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 옳다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 또한 옳다고.

타당화 받아본 경험으로
아이는 다른 이들의 감정 역시 틀리지 않았음을 이해한다.

나 또한 당신에게 말한다.
당신이 느낀 감정은 모두 틀리지 않았음을.
그 마음에 단 1프로의 의심도 없음을.
마음껏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우울해하고 불안해하고 경멸하고 혐오하고 미워하고 죄책감 느껴도 괜찮다고.
당신의 감정과 성격과 행동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고.
그렇기에 당신은 언제나 타당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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