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디김 Oct 16. 2024

가끔 호르몬을 이기는 날도 있다

아이들과 남은 시간 D-9년

저녁 8시 무렵, 우리는 일 때문에 잠시 외출을 해야 했다. 출고된 물건 파손과 관련하여 택배회사에 손해배상청구를 하기 위해 서류를 내러 가는 참이다. 민준이와 서준이에게는 문제집을 풀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애들은 어디를 나가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우리는 택배회사와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가야 하기에 일이 있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급하게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는 아직 위로 오르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아이들이 점퍼를 입음과 동시에 가방을 둘러메고 뒤쫓아 나왔다. 내복차림에 점퍼만 대충 걸쳐 아래는 내복바지와 맨발이 그대로 드러났다. 등 뒤엔 학교가방이 붙어 있었다.


"아니, 왜 나온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엄마, 아빠 미행하려고..."


미행이라.. 어디서 미행하는 탐정이라도 본 것인지 재킷 비슷한 것을 입고 가방까지 메었군. 목에는 장난감 망원경이 걸려있다. 참으로 어설픈 미행작전이다.


나는 아이들이 우리를 미행한답시구 밖을 헤맬까 걱정되어 절대 나오지 말고 숙제를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풀이 죽은 아이들은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현관문 안으로 사라졌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우리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여유가 없어 그대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나와 남편은 오가는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얘기를 했다. 주로 나의 기분 상태라든가, 나의 우울과 피곤의 원인들이 주제였다. 여자들은 한 달에 14일은 이런 상태이고 오늘이 그 14일 중 하루다. 남편은 나의 심리상태에 맞추어 오늘은 정말 100퍼센트 나를 달래주었다. 가라앉았던 마음들은 그의 따뜻한 말들로 수분을 머금은 꽃망울들이 고개를 들 듯 힘을 얻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택배회사에서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택배회사는 파손된 물건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


일도 순조롭게 해결되고 나의 기분상태도 어느 정도 해결되고 모든 것이 집을 나설 때보다 좋아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이들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미행을 하려고 밖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저녁 9시가 넘은 상태라 밖은 어두컴컴하다. 자주 가는 편의점이 떠올랐다. 제이가 편의점에 가보기로 했다. 나는 애들이 집에 올 것을 대비해 집에 있기로 했다.


단골 편의점은 아파트 바로 앞에 있어 5분 거리인데 15분이 지나도 제이에게 연락이 없다. 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들이 편의점에 없어서 주변을 더 찾아보고 있는 중이야."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 안을 '윌리를 찾아서'의 윌리를 찾듯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었다.


잠시 후 제이에게 전화가 왔다.


"애들 찾았어!"


"어디서?!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무인 문구점에 있더라. 자세한 것은 집에 가서 얘기할게."


나는 안도감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이것들이 집에 있으라니까 말도 안 듣고 나갔군.

어휴, 이제 컸다고 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구나.


나는 오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몸에 열기를 올리며 시동을 걸고 있었다.


현관문 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무인문구점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화를 내기 위해서는 뭔가 확실한 선창이 필요하다. 애들은 나의 선창에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런데 손에 웬 봉지가 들려 있다.


"잠깐만, 내 말 먼저 들어봐"


같이 혼을 내도 시원찮은 판에 제이가 나를 말리며 얘기했다.


"먼저 편의점에 갔더니 애들이 없어서 나도 그때부터 화가 났어. 혹시 저번에 같이 갔던 빵집에 간 건 아닌가 생각하고 그리로 가고 있는데 맞은편 무인 문구점에 애들이 있더라고. 다행이다, 싶어 들어갔지. 그런데 애들 뒷모습 모니 뭉클하더라. 애들이 뭔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어. 서툴러서 한 명이 겨우 잡아주고 낑낑대며 스카티 테이프를 붙이면서.."


"뭐?"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생일 선물 준비한다고, 애들이 늘어진 내복차림으로 둘이 선물을 포장하고 있는 거였어. 둘의 뒷모습을 보니 코가 시큰하더라."


"뭐? 내 생일선물?"


애들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비닐봉지 안에는 스마일 표정의 꽃잎들이 귀엽게 웃고 있는 노란색의 포장지가 보였다. 신문지로 고기를 감싸듯(너무 옛날인가?) 투박하게 물건을 감싸고 스카티 테이프로 어떻게든 틈을 막아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서툰 포장의 흔적이 있는.


나는 순간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내 생일이 며칠 후이다. 아이들은 이제 용돈을 모아 가끔 편의점에 가서 군것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돈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해서 지갑에 꽁꽁 싸매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서준이는 돈을 모아 반도체를 사서(그런데 개인이 반도체를 살 수 있나?)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선물을 샀다고?


화내려는 마음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나는 심장이 찌릿하더니 마음은 일렁이는 파도가 되어 울렁거렸다.


그런데 뭘 포장한 거지?


화를 내기 위해 시동을 걸었던 몸은 연료가 단번에 소진되었고 대신 눈에서는 하트가 나왔다. 나는 한 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이 되어 노란색 선물포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어? 다이어리네?


그곳에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핑크색 다이어리가 있었다. 너무, 너무 작아서 뭔가를 메모할 수도 없는 그런 크기다. 월요일 일정에 '오늘은 참 재밌었다' 한 줄 정도 쓰면 하루의 메모가 끝나는 크기다. 게다가 표지에는 딱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여자아이 캐릭터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감동도 감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아, 조금 더 쓸모 있는 것을 사 줬더라면..이라는 감동파괴의 악마가 속삭였다.


"민준아, 너무 고마워. 그런데 왜 다이어리를 산 거야?" (이것은 민준이의 용돈으로 것이다. 서준이는 다만 포장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며칠 전에 내가 엄마 다이어리를 젖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엄마한테 새 다이어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민준이가 며칠 전에 내 다이어리에 물을 쏟은 것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다이어리에 기록해 놓은 중요한 메모들을 못 쓰게 되어 속상해하며 민준이를 야단쳤다. 사라진 내용은 아쉽지만 새 속지를 끼워서 그 다이어리는 계속 쓸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애한테 너무 야단을 쳤었나?




"서준아, 숙제 다하고 엄마 생일 선물 사러 가자."


미행작전에 실패한 민준이는 현관문을 들어오며 뭔가 생각난 듯 서준이에게 얘기했다.


"생일 선물? 나는 좀 나중에 사려고. 엄마 생일 며칠 남았잖아. 아직 어떤 선물 살지 못 정했거든. 너는 정했어?"


"나는 다이어리 사려고. 엄마가 쓰는 다이어리 있잖아. 내가 거기에 물을 쏟아버렸어. 엄마가 엄청 속상해해서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엄마 아빠 나갔으니까 오늘 몰래 사놓는 게 좋겠어."


"아, 나는 뭐 선물하지?"


서준이는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너는 나중에 사고 지금은 같이 가서 내 거 선물부터 사자."


"어디에서 사는데?"


"무인 문구점에 다 있어."   

 

형제는 숙제를 얼른 끝마치고 옷장을 열어 찍찍이 지갑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최고의 쇼핑몰인 '무인 문구점'으로 향한다. 물론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둘은 청마 띠답게 탐스러운 머릿결을 휘날리며 힘 있게 달려간다. 쌍둥이 형제는 뭔가 목적이 있으면 항상 달려간다.

 

"여기 다이어리 있다. 엄마는 여자니까 이런 스타일 좋아할 것 같아. 우리 반 여자 애들도 이런 거 가지고 있더라고."


민준이는 확신에 차서 자그마한 핑크색 다이어리를 골랐다.


"오, 좋은데?"


서준이는 완벽하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포장지도 사야지. 이 노란색이 좋겠어. 우선 결제부터 하고 포장하자."


둘은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열심히 들락거리면서 터득한 결제기술로 순조롭게 키오스크 결제를 진행한다.  



"엄마가 좋아하겠지?"


      

   계속 보니 좋아진다


나는 한 달에 14일은 호르몬의 지배를 받아 불안정한 상태이고 나이가 먹어갈수록 몸의 노화까지 더해져 그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오늘은 내 생일 며칠 전이기도 하지만 그 14일 중 하루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우리 집에 사는 남자들이 내내 나를 괴롭혀온 호르몬을 보기 좋게 때려눕힌 기분이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때려눕히다:

1. 주먹이나 몽둥이 따위로 쳐서 쓰러지게 하다.

2. 싸움에서 상대를 완전히 이기다.


굉장히 매력적인 단어이군..


 




  

이전 12화 호갱이 될 수 밖에 없는 슬픈 몸뚱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