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집안을 부쉈다는 전화를 받은 건 오후 세 시였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는 듯한 목소리로 둘쩨가 말했다. 엄마가 울부짖었고, 막내는 소리를 질렀고, 결국 식탁과 장롱과 오래된 선풍기가 차례로 쓰러졌다고. 나는 수화기를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라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올 일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일흔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나에게 엄마는 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늘 분노와 원망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 어딘가에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평생 부모를 원망했다. 큰딸인 자신을 국민학교까지만 보내고 집안일을 시켰다고, 결혼도 원치 않는 남자와 시켰다고. 그 원망은 마치 유전처럼 딸들에게로 흘러왔다.
아빠는 엄마가 바라던 남자가 아니었다. 잘생기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남자를 외가에서는 좋게 봤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가 선택한 아빠는, 아니 선택당한 아빠는 너무 사람을 믿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했다. 사업은 배신으로 끝났고,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더 이용을 당했다. 그 와중에 1970년대 김대중 납치 사건이후 유신반대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빠는 민주화를 간절히 외쳤다. 낯선 서울에서 신혼을 시작하고 첫째를 임신한 엄마는 경제적 불안과 남편의 부재로 서서히 병들어 갔다.
그 불안 속에서 내가 태어났고, 돌이 갓 지난 나는 남도의 산골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엄마는 둘째 출산중, 난산으로 중환자실에 있었고, 연년생으로 태어난 나의 쌍둥이 여동생 중 하나는 죽었다. 살아남은 아이 하나와, 나중에 태어난 셋째, 그리고 막내. 엄마는 네 딸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살았다. 아빠는 도박을 했고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엄마는 늘 혼자였다.
지금 딸들은 엄마를 피한다. 대화는 언제나 누군가를 향한 원망과 울분, 그리고 울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첫째인 나와 막내가 가장 오래 버텼다. 나는 먼저 무너졌고, 깊은 우울과 사람을 피하는 병 속으로 들어갔다. 막내는 끝내 폭발했다. 집안을 부순 그날은, 어쩌면 막내가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도망친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폭력은 잘못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의 소리를 단순히 패륜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눌려 있던 감정이 깨지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우리 가족은 누구도 악인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 오래 서로를 다치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울고 있을 것이다. 막내는 죄책감 속에서 잠들지 못할 것이고,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며 겨우 숨을 고른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