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
거기까진 좋았다. 호주 가족들과 함께 살며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앞에 쓴 글에서 나는 오페어를 해서 좋은 점들을 나열해 놓았는데, 나쁜 점도 빠질 수 없지.
가장 불편했던 점은, 일과 일이 아닌 것들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짓기가 어려웠다.
일단 이 곳은 내 '근무지'와 동시에 사는 '집'이니 근무시간 외에도 가족들과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혼자 있고 싶어서 방문을 닫으면 퇴근이지만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이해할리 없었고, 심심하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놀자고 한다. 그러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업무의 연장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는 내게 원하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오페어의 주 업무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고 그 외에 시간이 날 때, 간단한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안 식구들은 나를 콩쥐처럼 부려먹었다.
보통 아침에 애들을 씻기고 옷을 입혀서 유치원에 데려다준 다음, 집으로 다시 돌아 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집안일을 하기 바빴다.
어질러진 침실들을 다 정리해야 했고, 일주일에 한번씩 대청소를 했다. 그리고 빨래 양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이틀에 한번 꼴로 해야 했다. 아이들이 실수로 침대에 오줌싸는 날이 잦았는데 그럴때는 세탁소 일일 체험의 날~^_^ ...
아이들의 엄마는 회계사라서 정장을 입고 다니는데, 내게 늘 다림질을 요구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부수업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고 순순히 응했다. 처음 하는 일이니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열심히 해줬다. 웃으면서.
그랬더니 점점 일이 많아지는 걸 느꼈고, 아줌마는 고마워 하긴커녕 콩쥐를 함부로 대하는 사악한 새 엄마로 변해있었다.
내가 밤에 조깅을 하러 나갔던 이유 중 하나는 업무가 종료됨과 동시에 그 장소를 뜨고 싶었다.
밤 8시면 퇴근인데 방문 밖으로 그들의 우는 소리, 웃는 소리, 싸우는 소리, 혼내는 소리가 다 들리니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지수가 확 올라간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공원에 가서 한두 시간 정도 뛰고 모두가 잠들었을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그 어느 때와 다름없이 뛰고 왔는데, 아이들과 엄마가 깬 상태로 나를 환영했다.
왜?
아이들이 당시에 커다란 퀸사이즈 침대를 함께 쓰고 있었는데,
내 방에 있던 두 개의 싱글침대와 바꾸자는 것이다.
그때 시각, 밤 10시였다.
나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얼른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아줌마랑 나는 둘이서 낑낑대며 침대를 옮겼다.
애들 방에는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었는데 침대를 옮기자 침대가 있던 부분에 먼지와 장난감 등이 가득했다.
갑자기 달밤에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근데 이 아줌마가 나한테 이 모든 것을 시키는 것이다.
슬슬 내 인내에 한계를 느낄 때 즈음 이 아줌마가 선을 넘었다.
청소기로 카펫에 쌓인 먼지를 다 제거해달라고 해서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펫 끝부분에 먼지가 모였고 청소기가 빨아들일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한테 혀를 차며 삿대질과 함께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오... 잠자던 폭탄을 건드렸어 너는....
나는 그때 꾹꾹 참아오던 것들이 폭발해버렸다. 청소기를 내팽겨치며,
그 순간, 악마가 씐 것 마냥 독기 있던 그녀의 눈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걸 목격했다.
아차 싶었나 보다.
그녀가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멋쩍게 웃어 보이며 Sorry... 하고 사과했다. 자기가 침대 커버 씌우고 마무리하겠다며(화 안냈으면 저것도 나한테 시키려고했나봄) 오늘 도와줘서 고맙고 대신 내일 일을 조금 덜 해도 된다고 했다.
그때 느꼈다.
부당하다고 느껴지면 참지 말고 당당하게 내 목소리를 내서 따져야한다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닌 줄 알고 더욱 무례하게 대하는 그들의 더럽고 비열한 태도.
이 곳은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동물의 왕국이다. 나는 앞으로 사자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