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어학연수
내가 지원한 국비지원 프로그램은 비즈니스, 차일드케어, 호텔관광 중 하나를 택해 그 분야를 영어수업과 병행해 3개월간 수업을 듣게 된다.
그 후에 호주로 가 관련 직종에서 한 달간 무급으로 실습하고 취업을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나는 영어를 가장 많이 쓸 수 있는 직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경험이 전혀 없는.. 차일드케어를 (당시 아이들을 그저 시끄럽고 귀찮은 존재라 생각하고 싫어했다.) 오로지 영어를 위해 덜컥 선택했다.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아교육학과 졸업반 대학생 친구들이었다.
직장인 언니들도 이전에 유치원 선생님이었거나 간호사 등 관련직에 종사하다 와서 이미 그쪽으로 지식이 빠삭했다. 영어도 안되고 유아교육 쪽으로 지식과 경험이 하나도 없는 내게는 너무나도 불리한 시작이었다.
나만 못하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은데 이미 이곳에는 내 위에서 날고뛰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수능 공부하듯 코피 터지게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처럼 나는 또 길을 잃었다.
아마 여태껏 현실을 도피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에서의 그 치열한 삶이, 피 튀기는 경쟁이 싫어서 이곳 멀리 필리핀에 와있는데 사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나는 여전히 한국인 무리에 끼여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며 살고 있구나.
죽자 사자 열심히 한다고 한들 시간과 노력을 쏟은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그러면 커다란 실망감과 좌절감을 안고 결국 일찍이 포기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계속 흘러만 갔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두렵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이나 먹기로 했다.
이왕 외국에 나온 거 공부가 안되면 실컷 즐기기라도 해야지 싶어서 나와 비슷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공자가 말하길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고 했지 않는가.
아는 것보다 좋아하고 즐기며 실천하는 자가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 뭐 그런 뜻이지.
그렇게 즐기다 보니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던 중국, 일본 학생들 몇몇과 필리핀 현지 선생님들과 자연스레 친해졌다.
많은 한국인들이 앓고있는 영어울렁증은 알코올의 힘을 빌어 극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보디랭귀지로 시작해서 점점 옹알이로 발전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단어로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샌가 짧은 문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회화가 가능해졌다.
생각해보니 아기가 처음 말을 배울 때와 같은 원리인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남들과 비교해 봤을 때 현저히 부족했지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방식이 다 다르고 무작정 남들을 따라 하기보다는 본인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공부한다면 더욱 효율적으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맞는 학습 스타일은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여 얻는 '체화'였다.
겉으로 보기엔 마냥 노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렇게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 자체가 내게는 아주 값진 수업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눈짓, 몸짓을 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고 나도 그렇게 하여금 표현을 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간다는 것.
그것은 영어보다도 더 중요한 세계 공용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