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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Kim Jul 18. 2020

영어의 배신

호주공항에서 멘붕

아는 이 하나 없던 낯선 나라, 필리핀에서의 꿈같던 3 개월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돈독한 우정을 쌓다 보니 금세 제2의 comfort zone이 형성되었다.


comfort zone 이란, 직역하면 안전지대 곧,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인데  이런 편안함은 우리 마음을 약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정도면 됐다고.. 충분하다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편안한 곳에 머무르려고만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 없이 그냥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안주할 수 없었다. 상황이 우리를 자꾸만 앞으로 밀어낸다.

정들었던 친구, 선생님, 장소와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는 진짜 우리의 목적지 '호주'에 갈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의 필리핀 생활은 호주를 위한 예행연습이었으니까.


그간 영어가 많이 늘었다고 생각 했다. 3개월 정도 살다 보니 마트에서 아무 문제 없이 물건을 살 수 있었고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다. 지프니를 타고 현지인들 사이에 끼여 여기저기 이동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호주에 가면 더 이상 영어 때문에 고생하지 않겠다는 근거 없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내에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이 우리를 반겼다.  

그런데..

.....? ? ? ...

비행기 착륙할때 먹먹해진 귀가 아직 막혀있나 ?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마. 디. 도!


그랬다. 나는 지난 몇 개월간 필리핀식 영어를 배워왔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필리핀은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스페인 문화가 자연스레 그들의 삶과 언어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들은 모국어'tagalog'와 영어를 말할 때 여전히 스페인식의 강한 억양을 가지고 있다.


호주는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과 긴 말을 줄여 쓰는 '슬랭'이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게다가 우리는 학교에서 오랫동안 미국식 영어 위주로 배워왔고, 대중매체에서도 호주의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게 지금 이 언어는 외계어로 들린다. 


"웅얼웅얼~~!@#$%$^%&*&%^*~~~~샬라 샬라"


티브이에서 자주 보던 파란 눈과 금발을 가진 키 큰 외국인들이 내 눈앞에서 옹알이를 하고 있다.

다시 위축되기 시작했다. 

영어울렁증을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지 필리핀에서, 나와 그나마 비슷한 눈과 머리색을 가진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시드니 공항에서 나는 도착과 동시에 큰 멘붕이 왔다.

필리핀에서 3개월 동안 들인 내 노력과 수고가(열심히 논 노력...) 뒤통수를 제대로 치고 도망친 것 같다. 

막막하다.  앞으로 남은 일 년이라는 생활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것도 도착 직후 처음 발을 뗀 공항 안에서, 차마 입은 떼지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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