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워홀러의 처절한 생존기..
호주에서 우리를 이용.. 아 아니, 책임지고 관리해 주신 두 분이 있다.
한국인 원장 부부. 두 분은 호주에 와서 유치원을 세 개 정도 운영하고 계셨다.
우리는 필리핀에서 이미 3개월간 차일드케어에 관한 이론수업과 시험은 다 치고 온 상태라, 호주에서 한 달간 실습을 하고 해당 시간을 채우고 나면 자격증을 받고 프로그램이 종료된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나의 영어실력은 호주에 도착함과 동시에 초심을 되찾았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실전에 돌입했다.
대부분 친구들은 원장님이 경영하시는 유치원으로 실습을 갔고, 나와 여정이는 단둘이서만 호주인이 경영하는 유치원으로 보내졌다.
'우리 둘 다 영어 겁나게 못하는데 .. ㅡㅡ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거 아니야..
애들이 말 안 들으면 어떡해..ㅠㅠ
그냥 아프다고 하고 쉴까..'
머리에 온갖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당연히 잠을 설쳤고 아주 피곤한 몸뚱어리를 억지로 이끌고 원장님 밴에 탔다.
원장님이 아침 일찍 우리를 픽업해서 각자 유치원에 태워다 주셨다.
우리가 꼭 유치원생이 된 것만 같다.
영어 수준과 정신연령은 유치원생이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드디어 도착했다. 쿵쾅쿵쾅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하... 선생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 무섭다!!
다행히 원장님이 같이 내려서 우리를 헤드 티처에게 소개해 주셨다.
뚱뚱한 백인 중년 여성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자신이 킴이라고 했다.
' 오!! 급 반갑네. 어디 김 씨예요? 나도 성이 킴인데!!'
혼자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해대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참고로 킴은 외국에서 흔한 이름이다. 성이 아니라...)
"나이스 투 미 츄, I am Jessica."
"...I am sorry? G..what?"
내 영어 이름은 제시카다. 근데 우리가 한국에서 소녀시대 제시카 부르듯 말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한국에서는 보통 '시'에 강세를 두는데 (제시카)
영어로는 앞 '제'에 둔다.
그리고 '제'가 아니라 '줴'고, '시'가 아니라 '씨' 다.
자 ~ 줴에 강세를 주고 따라 해 보시라. 줴씨카
선생님들은 당연히 내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고 나는 결국 종이에 써서 보여주는 대굴욕을 맛봤다.
"아~! 줴씨카!!!"
줴씨카가 마치 유레카처럼 들린다.
하.... 힘들다. 시작부터 내 이름 하나 발음 못하고, 이게 무슨 망신이냐고오 ㅠㅠㅠㅠ
그 후로 나는 자기소개하는 게 너무 싫어졌다.
앞으로 수백 번 수천 번 내 입으로 내뱉어야 되는 이름인데 어떻게 하지?
이름을 바꿀까.....
킴이 우리를 실내로 안내했다.
그곳엔 우리 외에도 미리 실습나온 대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캄보디아, 중국계 호주인 그리고 너무나도 반가운 한국인이 있었다.
이곳에 오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그냥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사실에 이미 베프가 된 것 같다.
호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영어를 월등히 잘하는 것 같아 앞으로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겠지 하며 행복해하던 찰나에
그녀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한다.
"이번 주가 마지막이에요. 실습이 끝나서요.."
좌절, 희망 그리고 좌절의 연속.
캄보디아 친구도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인수인계하고 떠나는가보다.
이 유치원에는 0세부터 만 2세 이하의 어린 아기들이 있는 영유아반과 2세 이상 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있는 반으로 나누어진다.
여정이는 영유아반을 맡게 되었고 나는 어린이반을 맡았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어린이반 애들은 말을 너무 잘하는데 나는 못 알아듣고.... 말도 못 하고.. 그러니까 놀아주는 게 힘들다. 그래서 날 무시한다. 미운 네 살친구들은 일부러 처음 보는 나를 시험에 들게 하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줬다.
하지만 아기들은 말을 잘 못하니까 대화가 안 통해서 발생하는 정신적 고통은 적지만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걷지못하는 아기가 많으니 번쩍번쩍 들어올리는둥 하나하나 다 해줘야 되니 신체적으로 무리가 많이 가고, 아기들이 너무 자주 울어서 힘들다고 했다.
게다가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은 다들 나이가 많았고 진지했으며 차갑고 무서웠다.
안 그래도 영어울렁증 때문에 입이 안 떨어지는 상황이였는데, 이제는 아예 윗입술 아랫입술을 초강력 본드로 붙인 것 같다.
가끔 나를 지나치면서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그들의 발음을 알아듣기가 힘든 나는 영구처럼 웃으면서 바보 흉내나 냈다. 헤헷^,.^;
오늘 하루는 일 년처럼 길고 다이나믹했다 . 8시부터 5시까지 쉴 새 없이 애들 눈치 보랴, 선생님들 눈치 보랴, 마지막엔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 눈치 보랴 너덜너덜해진 내 정신과 육체.
기분 탓인진 모르겠으나 영어를 잘 모르는 새로 온 동양인 실습생들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눈빛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다.
괜히 죄스럽다.
자괴감이 든다는 건 이런 것인가.
내가 이러려고 호주까지 왔나.
이 짓을 내일 또 해야 되나.
아니지.. 한 달 동안 해야 되나...
생각만으로도 구토가 쏠릴 것 같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 잘 버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