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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e Aug 11. 2021

엄지, 소녀는 참지 않는다

[다시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엄지 공주']

모두가 그 소녀를 엄지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본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떤 말 많은 이가 선술집에서 잔뜩 술에 취해 떠벌린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져있기는 하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엄지가 소녀들을 납치하기로 유명한 섬蟾 파에 잡혔을 때, 두꺼비를 닮은 것으로 소문난 섬 파의 두목은 자신을 끝까지 붙드는 엄지 어머니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다. 그는 그 이야기를 엄지에게 매일같이 들려주며 껄껄 웃었다. 그 이후로 엄지는 자신이 죽이는 모든 이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다고 했다. 물론 가장 먼저 잘려 나간 것은 섬 파 두목의 엄지손가락이었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엄지를 어떻게든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던 그의 역겨운 소망은 그에게 고분고분 말을 듣는 척하며 싸움을 배우고, 섬 파의 일원처럼 행동하던 엄지의 날쌘 반격에 의해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내가 엄지에게 어떻게 그 무서운 섬 파 두목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인지 물었을 때, 엄지는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엄지가 암살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섬 파 두목의 크나큰 실수였다. 엄지는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치르기로 한 날 저녁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완전히 무장해제한 두목이 등을 보이자마자 그의 등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 앉았다고 했다. 유릿가루를 촘촘히 발라둔 실이 순식간에 그의 목을 파고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의 양쪽 엄지는 몸에서 잘려져 나갔다. 엄지는 두목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때 사용한 작은 칼을 들고 나왔고 제 앞길을 막는 다른 섬 파의 일원들도 해치운 뒤, 그들의 엄지를 모두 잘라버렸다.  


섬 파 두목의 모가지가 날아간 이야기에 쾌재를 부르며 탐욕스러운 마음을 품은 자가 하나 더 있었다. 풍뎅이를 의미하는 금귀자金龜子 파의 두목이었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그는 엄지와 섬 파 두목의 결혼식 날 엄지를 처음 보고 엄지에게 반해버렸다. 섬 파의 두목을 죽인 엄지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때, 엄지를 찾기 위해 가장 애쓴 것도 이자였다. 그는 결국 시외버스를 타고 도시를 떠나려던 엄지를 찾아냈고, 버스를 도중에 세워 엄지를 끌고 갔다. 엄지가 자신의 저승사자인 줄도 모른 채. 그는 자신의 여자들을 가둬둔 집의 가장 안쪽 방에 엄지를 가둬놓았고 보물을 얻은 양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금귀자파 두목은 매일같이 엄지를 가둬둔 방에 찾아가 각종 금붙이와 선물을 선사하며 그녀에게 구애했지만, 엄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금귀자파 두목은 어떻게 하면 너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그녀의 발아래 엎드려 물었다. 

“실을 줘.”

엄지의 말에 알록달록하고 고운 실과 자수 재료들이 엄지의 방에 쌓였다. 엄지는 자수를 놓는 척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어느 날 밤, 침대 위에 앉아 금귀자 파의 두목을 불렀다. 목욕재계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온 그는 엄지를 꼭 끌어안았다. 엄지는 두목이 자신의 옷을 벗기는 순간에도 반항하지 않았다. 두목의 가운을 벗겨준 엄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두목이 미소짓자 엄지도 미소짓던 그 순간, 엄지의 손날이 두목의 목울대를 강하게 내리쳤다. 두목의 몸은 순간 굳어버렸다. 아직 그에게 숨이 붙은 것을 본 엄지는 베개로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눌렀다. 두목은 점점 힘이 빠져가는 손으로 엄지의 몸을 때리고 긁었지만, 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엄지는 유릿가루를 발라둔 실로 두목의 두 엄지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그의 몸을 뒤져 섬 파 두목에게서 빼앗은 자신의 칼과 열쇠다발을 찾아냈다. 갇혀 있던 모든 여자의 방을 하나하나 다 열어준 엄지는 앞을 막고 지키던 금귀자 파 일원들도 망설임 없이 죽인 뒤 모습을 감췄다.   


내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은 왜 엄지를 보는 모두가 엄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그 이유를 도시를 벗어난 교외의 작은 마을에서 나와 엄지가 만났을 때 알게 되었다.

섬 파와 금귀자 파의 수장들을 해치운 엄지는 도시를 떠나 이 마을에 흘러들어왔다. 먹을 것도 돈도 없어 굶어 죽기 일보 직전, 엄지는 마을에서 작은 선술집 ‘서목鼠目’을 운영하는 노파의 눈에 띄어 목숨을 건졌다. 노파는 엄지를 극진히 돌보았고, 오갈 데 없는 엄지를 자신의 딸로 삼았다. 엄지는 처음 맛보는 평안에 행복했다. 불편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단 하나, 매일 밤 선술집에 들러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내 분鼢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그가 노파에게 매우 잘했고 노파도 그를 좋아했으므로 엄지도 싫다는 내색 없이 분을 대했다. 

노파와 분은 매일 밤 한 시간씩 선술집 문을 닫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 때가 되면 엄지는 마을 근처의 호수 주변을 달렸다. 엄지는 밤이 무섭지 않았다. 밤에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광경, 반짝이는 별들과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호수를 보았고,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매일 그곳을 달렸다. 그렇게 달리던 어느 날, 엄지는 분과 종종 어울리던 사내들이 어떤 사람을 호수에 집어 던지는 것을 보았다. 풀숲에 몸을 숨기고 그를 모두 보던 엄지는 사내들이 사라지자마자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물속에 가라앉던 사람을 끄집어냈다. 자신 만큼이나 마르고 어린, 아직 열여덟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엄지는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제 숨을 불어넣었고 그의 가슴을 쳤다. 곧 소년은 기침하며 정신을 차렸고, 달빛과 호기심을 가득 머금은 엄지의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엄지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엄지는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왜 죽을 뻔한 것인지까지. 단지 마지막에 나를 죽이려 한 이들이 나를 제비라 불렀던 것이 기억나 엄지에게 내 이름이 제비라고 일러주었다. 엄지는 나를 부축해 마을로 데려왔다. 엄지는 노파의 선술집 안쪽 자신이 머물던 방 뒤의 작은 창고에 나를 넣어두었고 매일 음식을 가져와 내게 먹이고 내 몸의 상처들을 치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조금씩 내게 풀어주었다. 우리는 가까워졌고 나는 곧 엄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섬 파와 금귀자 파의 두목들이 엄지를 갖고 싶어 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차갑고 냉철한 표정 아래에 불타오르는 눈빛과 카리스마는 순식간에 보는 이가 그녀에게 빠져들게 했다. 게다가 그 작고 마른 몸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어찌나 근사했는지!

그러나 어느 날부터 엄지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엄지는 매번 고개를 저으며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지는 내게 노파의 소원대로 분과 결혼을 올리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된 엄지가 결혼이라니, 나는 엄지에게 나와 함께 도망을 가자고 제안했다. 엄지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할머니를 저버릴 수 없어. 할머니는 내게 유일한 가족이야. 엄마와도 같은.”

엄지의 말은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엄지 역시 내게 유일한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분이라는 작자와 선술집 노파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고 기분이 나빴지만, 엄지에게 차마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엄지는 노파의 소원대로 분과 결혼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나이는 많지만, 공장주인이고 부자인 그와 결혼하면 노파가 죽어도 엄지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라는 게 노파의 생각이었다. 노파는 엄지가 분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걱정으로 가슴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엄지에게 말했다. 결혼하기 싫다는 엄지의 말에 몇 번 화를 내다 실신하기도 했다. 

나는 엄지와 분의 결혼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이제는 엄지에게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분과 엄지의 결혼식 전날, 나는 잠든 엄지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엄지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내 두 뺨에도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선술집을 나왔다. 

밤새 도시로 향하는 길을 걷던 내 옆으로 덤프트럭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트럭을 피하려던 나는 발을 헛디뎌 옆의 도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땅에 세게 머리를 부딪친 순간, 천천히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보육원에서 노파에게 이끌려 갔던 공장.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자고 매를 맞던 아이들. 끝없이 계속되던 일. 밤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여자아이들. 그리고 그곳에 납치하거나 잡아 온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매일 밤 아이들을 학대하던 노파와 그것을 보고 만족하던 분의 모습! 

당장 엄지에게로 되돌아가야 했다. 나는 뒤로 돌아 지금껏 오던 길을 힘껏 달렸다. 새벽 동이 트기 전 다시 선술집 문을 따고 들어가 엄지를 깨웠고, 이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믿을 수 없어 하는 엄지의 표정을 보고 나는 엄지를 데리고 나왔다. 몸이 약해진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실수만 하자 분과 그의 부하들이 나를 죽이려 했던 것과, 그전까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려줘야만 했다. 선술집 뒤편으로 가면 있는 분의 공장 안쪽 쪽방 문을 열자 조그만 방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자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엄지의 눈 안쪽에 불이 켜졌다.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데 그럴싸한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내 물음에 엄지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도망가지 않겠느냐는 내 제안에 엄지는 이대로 도망갈 수는 없다며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은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치러졌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엄지가 부케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나는 교회의 맨 뒤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었다. 분의 일당 몇몇과 노파만이 하객 석에 앉아 있었다. 분은 눈이 작고 매우 큰 손을 가진 사내였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함께 입장하자 분의 갈퀴 같은 거대한 손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엄지는 앉아 있는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분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지루한 순서들이 지나고, 주례사가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라고 말하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분의 얼굴이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분은 엄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엄지가 분의 손에 반지를 끼워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케 한가운데서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반짝 빛났다. 분도, 분의 부하들도 미처 대응하지 못할 빠른 몸놀림이었다. 처음에는 엄지가 분을 끌어안는 줄 알았다. 엄지는 분에게 달려들어 부케 끝으로 분의 목을 여러 차례 찔렀다. 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엄지는 분의 몸을 뒤져 열쇠 꾸러미를 꺼내 내게 던졌다. 분의 부하들이 내게 달려들려 하자 엄지는 드레스를 찢고 노파가 머리에 씌워준 화관을 벗어 던졌다. 높은 구두마저 벗어 던진 엄지는 한 손에 단도가 꽂힌 부케를 들고 분의 부하들과 맞서 싸웠다. 작고 재빠른 엄지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공장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모두 구했다. 아이들에게 삽과 쇠파이프 따위를 쥐여준 나는 아이들과 함께 교회로 달렸다. 문을 열자 붉게 물든 드레스 차림의 엄지와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분의 부하들, 엄지가 잘려나간 분,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한 마리 쥐새끼처럼 작고 쪼글쪼글한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내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엄지를 때리고 있었다. 엄지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었던 사람. 엄지는 노파를 향해 부케에서 꺼낸 단도를 치켜들었다.

“엄지야!”

엄지는 나를 쳐다보았다. 슬픔과 분노와 배신감이 뒤섞인 눈물이 엄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엄지는 단도를 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교회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노파에게 달려들었다. 노파는 엄지에게서는 목숨을 보전했을지 몰라도 아이들로부터는 아니었으리라.


엄지는 이 마을을 떠나려 했지만, 나와 아이들이 엄지를 붙잡았다. 자신들과 함께 있어 달라는 아이들의 간곡한 요청은 엄지의 마음을 움직였고 엄지는 서목鼠目과 분의 공장까지 떠맡게 되었다. 나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다니며 엄지나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종종 데려왔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면 엄지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들을 배우게 되면 돌아가 우리 공장의 아이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서목으로 돌아가 문을 열면 낯익은 얼굴들이 나를 반긴다. 그리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서목과 공장의 이곳저곳을 오가며 바삐 일하는 소녀를 만날 수 있다. 나를 보고 다정히 웃어주지만, 그 내면에 호랑이를 품고 있는 소녀. 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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