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과사자 Aug 12. 2021

초록 테이블에서 여섯 번의 식사를

콜로라도 Mesa Verde National Park

두 아이를 데리고 600km 넘는 곳으로 가기로 결정한 건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우리는 올여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로드 트립이 떠올랐다. 6년 넘게 살아온 콜로라도 탐험이 목표.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메사 베르데 국립공원이었다. 꼭대기가 평평한 지형 때문에 초록 테이블이란 뜻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대 유적지가 있다고? 색다를 것 같아 첫 캠핑지로 정했다.


우리는 벨 텐트를 구입했고 텐트 치는 연습을 하려고 뒷마당 캠핑을 시도했다. 박아야 하는 말뚝은 많은데 공간이 없어 아쉬운 대로 한쪽만 제대로 치고 1박을 해보았다.


뒷마당 캠핑이라. 감성적인 분위기를 기대했건만 우리 동네 주택 간격이 워낙 좁아서 이웃집 실외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야 했다. 밤늦게 지나다니는 차는 또 어찌나 많은지 자고나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가장 큰 일은 며칠 뒤 터졌다. 비 소식이 있어서 방수 성능 시험하려고 그대로 뒀더니 중심 기둥이 부러지면서 텐트가 무너지고 홍수가 났던 것이다. 캠핑장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다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판매자는 기둥만 다시 보내 주었다.


아이들과 하는 첫 가족 캠핑을 그 먼 곳에 그것도 3박 4일로 잡다니! 날짜가 다가올수록 후회와 불안감이 몰려왔다. 여섯 번 먹을 음식 준비하는 것도 큰 일이었고 추운 날씨가 예보되어 따뜻한 옷도 넉넉히 챙겨야 했다.


5월 16일에 막상 길을 나서자 마음은 편해졌다. US-285를 타고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약 100km에 달하는 직진 코스가 있었다. 띄엄띄엄 농가가 있고 눈만 돌렸다 하면 해발 4000미터 이상의 콜로라도 포티너스가 보이는 도로를 그야말로 신나게 달렸다.


리오 그란데 국유림과 산 후안 국유림이 나오면서 산악 지형으로 바뀌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두 국유림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 휴게소 옆으로 흐르는 강에서 래프팅 하는 사람들이 꽃과 사자에게 손을 흔들었고 구비구비 펼쳐진 도로를 따라 산을 넘을 때마다 예쁜 숲과 목장이 펼쳐졌다.


리오 그란데 국유림


국유림을 빠져나와 바이슨을 많이 키우는 목장 지대를 지나니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어떤 곳일지 궁금해하며 한 고비 돌자 시야가 탁 트인 전망대가 바로 나타났다. “I like it here!”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초록 테이블이 마음에 들었다.


꽃과 사자는 캠핑을 위해 태어난 듯 캠핑장에 바로 적응했다. 텐트 세우는 걸 도우려고 이것저것 만지다가 관목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개미를 쫓다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덤프트럭을 가지고 놀았다.


저녁의 하이라이트는 모닥불에 하는 스모어. 계속 fire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바람과 달리 장작에 불이 붙지 않았다. 포기하려는 찰나 이웃 캠핑객의 도움을 받아 불을 지필 수 있었다. 약한 불에 구워야 한다는 걸 몰라서 처음엔 마시멜로가 거의 타 버렸지만 꽃과 사자는 행복하게 스모어를 먹었다.


모어필드 캠핑장


다음 날 우리는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게 되었다. 일명 캠핑장에서 꽃과 사자와 함께하는 외출 준비.


남편이 치우고 설거지하는 동안 내가 아이들을 봤는데 꽃과 사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갑자기 어디 갔나 했더니 베어 박스 안에서 발견되기도 했고 잠깐 왔다 사라진 사슴 찾겠다고 먼 수풀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캠핑장 거대 쓰레기통을 치우러 온 청소차는 특히 사자의 취향을 저격했다. 청소차 노래를 몇 번이고 부르다가 쿵하고 내려놓는 소리에 맞춰 감탄했다. 꽃도 같이 트럭이라고 노래하지만 사자의 언어가 꽃을 넘어선 건 거의 자명했다.


비장애아 동생은 언제 장애아 누나를 따라잡는가. 둘째를 가지기 전 나는 이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장애아라도 어릴 때만큼은 누나와 동생답게 지내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자의 발달을 막을 순 없었기에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지는 못 했다.


꽃은 터미 타임 하는 동생한테 책을 읽어 주고 걷기 시작한 동생에게 손뼉 쳐 주었다. 동생을 위해 장난감을 켜주고 킥보드 시범을 보였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나자 아기였던 사자는 꽃이 하지 못 하는 말을 하며 꽃보다 힘차게 청소차를 쫓아가게 되었다.


같이 크는 거나 마찬가지인 아이들을 보니 생각의 초점이 옮겨간다. 장애아 누나와 비장애아 동생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까?


오전 시간을 다 할애하고 나서야 우리는 관광을 나설 수 있었다. 메사 베르데의 전망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우리 쪽으로는 초록 테이블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산이 줄지어 있었고 드넓은 평지 저어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사방에 걸린 비구름도 그렇게 확연히 보일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꽃과 사자는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걸으며 장난을 치다가 서로 손을 잡고 깔깔대기도 했다. 내가 저기 보라고 손짓하면 우와 한번 하고는 작은 벌레를 찾아다녔다. 사진 찍게 이리 보라고 해도 딴짓만 했지만 확실히 기분은 좋은듯했다.


파크 포인트 전망대


경치 구경이 끝나자 벼랑 거주지 중 하나인 스프루스 트리 하우스를 보러 갔다. 아이들 때문에 피곤하다며 별 관심 없던 남편도 이곳은 인상적이었는지 표정이 좀 풀렸다.


13세기에 누군가가 이 깊은 골짜기에 들어와 그것도 절벽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니.. 그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상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가 멀쩡한 집에 살면서 이곳을 관광한다고 해서 우리 삶이 고되지 않은 것 또한 아니었다. 캠핑장으로 돌아온 꽃과 사자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녔고 차에 태워 샤워장을 오가야 했고 텐트 안을 막 굴러다니는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곯아떨어졌다. 밤 열 시였다.


스프루스 트리 하우스


캠핑장에서 3일째가 되자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일정 치고 너무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고기를 꼼꼼하게 싸지 못해서 핏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다른 음식에 안 닿았으면 됐지, 아이스 박스 씻으면 되지 하고 화는 나지 않았다.


이곳저곳 다 가야겠다는 욕심도 버리고 롱 하우스만 보고 보기로 했다. 오늘도 아이들은 국립공원 안에 있는 터널 지나는 것을 좋아했고 1.6km의 롱 하우스 트레일도 문제없었다. 어떤 아저씨가 막판에 가면 아이들이 힘들 거라고 했지만 꽃과 사자는 철제 계단도 잘만 올라갔다.


롱 하우스. 백 명 이상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고학적 장소를 직접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감동이었다. 그렇게 불어대는 바람이 집 안에서는 잠잠한 것도 신기했다.


사다리를 타고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아이들 때문에 관리원 눈치를 봤더니 만지지 않으면 괜찮단다. 꽃과 사자는 고고학적 가치가 뭔지 아는 것처럼 눈으로 보기만 했다.


내리는 비속에 차를 타고 캠핑장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꽉 차는 일은 거의 없다는 말에 캠핑장이 별로라 그런 줄 알았더니 너무 커서 그런 것 같았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미국 사람들은 우비만 입고 개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한 자매는 우비도 없이 꽤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도 차분하게 자기 텐트를 찾아가는 중이었고 RV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처마 밑에 앉아 빗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 기타를 치고 있었고 땅에서 흙냄새가 올라왔다.


사슴이 내려왔길래 애들한테 말해주려고 돌아보니 꽃과 사자는 잠이 들었다. 메사 베르데 국립공원.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엔 존재조차 잘 몰랐던 곳에 우리가 이렇게 와서 추억을 남길 수 있음이 감사했다. 초록 테이블에서 한 여섯 번의 식사는 맛있었다.


롱 하우스 가는 길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 네 번 탈락, 오수생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