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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Aug 14. 2021

말이 씨가 된다

콜로라도 Glacier Basin Campground

미국에서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은 메모리얼 데이라고 불리는 현충일이다. 우리는 일찌감치 연휴 캠핑 계획을 잡았다. 장소는 글래이셔 베이슨 캠핑장. 로키산 국립공원 안에 다섯 캠핑장이 있는데 그중 운영되고 있는 두 군데 중 한 곳이었다.


며칠 전부터 날씨 체크에 들어갔다. 날씨가 들쑥날쑥한 5월이라도 여름 문턱에서 밤 기온 영하라니. 내가 아무리 “심하다!”라고 해도 예보는 변하지 않았다. 5월 중순 메사 베르데 국립공원에서도 추웠는데 그것보다 더 춥다니 걱정하면서도 예정된 캠핑을 떠났다. 우리의 모토 “예약한 곳은 일단 가고 본다.”


캠핑장은 우리가 늘 “저긴 뭐지?”하고 지나쳤던 곳에 있었다. 거기가 여기였구나! 베어 호수 가는 도로를 벗어나 캠핑장 길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이곳 이름이  글래이셔 베이슨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 덮인 산이(glacier) 분지(basin)를 둘러싸고 있었다.


꽤 큰 캠핑장을 일부러 한 바퀴 돌다 보니 우리 자리가 보인다. 탁 트인 전망은 아니어도 소나무에 둘러싸여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 캠핑장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데 바로 그 옆이었다. 원래는 화장실 근처 싫어하지만 한 명이 둘 보기 힘든 우리에겐 오히려 다행이었다.


오늘 하루 우리 집


저쪽 어느 집 아이들이 텐트 안에서 난리 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개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부모들은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제 몸 건사할 수 있는 아이들이라는 게 부러웠다. 꽃과 사자는 아직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이인데 말도 안 듣는 중이었다.


텐트 주변에서 얌전히 노는 게 아니라 바위에 올라가거나 남의 집이 궁금한 꽃과 사자. 가장 힘든 건 아무 데나 막 뛰어갈 때였다. 주도하는 건 대부분 꽃이었고 꽃은 여간 재빠른 게 아니다. 내가 스탑이라고 해도 그것이 게임이라고 생각하는지 웃으면서 더 열심히 더 멀리 달리는 꽃을 보고 있으면 몸보다 마음이 지친다.


세네 살 때 꽃은 지금보다 더 심하게 더 자주 도망가거나 길바닥에서 짜증을 부렸다. 그때 비하면 좋아진 것 같다가도 언제 어디서 그럴지 모르는 아이. 나이에 맞는 침착함이 없는 아이. 그것이 장애에서 온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유하게 대처하기는 참 쉽지 않다.


꽃을 잡아온 나는 너무 열이 받았다. 다 설명하지 않아도 남편은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아이들한테 엄마 말 들어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화내면 안 된다고 왜  나한테 탓하지 않는지 물어볼 때도 있다. 그러면 남편이 이렇게 대답한다.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스프라그 호수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호수를 보러 가기로 했다. 캠핑장에서 연결되는 곳이라도 덜 걷는 게 득인 것 같아 차를 탔다. 스프라그 호수. 코비드 이후로 로키산 국립공원이 성수기 예약제를 시작한 걸 모르고 작년 여름 무턱대고 왔다가 허탕을 쳤던 곳이었다.


스프라그 호수는 주차장부터 매력적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숲 속에 위치한 피크닉 테이블, 졸졸 흐르는 개울물, 주차장 바로 옆에 잘 정비된 호수 둘레길. 비 온 뒤 공기가 너무 깨끗하고 물이 맑아서인지 카메라에 인물 사진 모드를 누르면 아이들 대신 배경에 포커스가 갈 정도였다.


사자는 차에서 늦은 낮잠에 들었다. 꽃을 데리고 나갔더니 호수보다는 개울가에 놓인 외나무다리에 관심을 보인다. 열 번 정도 건너고 나니 내가 원하는 호수에도 같이 가주었다. 물웅덩이 물마저도 투명하다며 감탄하고 있는데 꽃이 그것만 밟으며 지나간다. 이럴 줄 알고 부츠를 신기긴 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 앞에 섰다가 옆으로 지나가는데?


미니 마우스 레인코트를 입고 있는 꽃을 보고 누가 예쁜 미니라며 웃는 찰나에 꽃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행인도 당황해서 빨리 지나가고 나도 괜히 미안해서 꽃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남편과 사자랑 마주쳤다. 누나가 하는 걸 보지 않아도 물웅덩이를 참방 거리며 지나가는 사자. 그래, 너희 한 뱃속에서 나온 남매 맞다!


우리는 남매


저녁 무렵에는 걸어서 캠핑장 입구에 파는 장작을 사러 갔다. 잘 가던 꽃은 다른 방향으로 튀었고 사자도 따라갔다. 엘크를 발견해서 구경하다가 다시 장작 파는 곳으로 갔다. 구름을 뚫고 나온 저녁 햇살이 비치는 로키산 캠핑장에서는 장작 파는 트럭마저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날이 춥다고 두 묶음이나 샀더니 무거웠다. 꽃과 사자가 계속 도우려고 해서 돌아오는 걸음은 무척 느렸다. 그 와중에도 캠핑장 풍경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기껏 들고 온 장작에 불이 붙지 않았다. 이웃 캠핑객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티피 모양으로 쌓아야 한다며 멋진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 이웃은 장작 패는 도끼까지 있던데 캠핑 필수품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핸드폰으로나마 밤하늘 사진을 찍고 잠을 청했다. 침낭에 이불 깔고 후드티에 겨울 잠바까지 껴입어서인지 생각보다는 덜 추웠다. 콜로라도에 산지 6년 만에 로키산에서 캠핑을 하다니. 로키산 근처에 살고 있는 게 아직도 새삼스러웠다. 혹시 내가 했던 말들이 씨가 되었던 걸까?




1. 말이 씨가 된다


세계 이곳저곳 살아보고 싶어요


2010년 어느 날 나는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와 그저 그런 만남이었는데 내가 했던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잠깐이라도 스쳐간 남자들은 나를 결혼의 대상으로 봐도 될지 알고 싶어 할 때였다. 그 남자는 내가 꿈꾸는 결혼생활을 물었고 결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저곳 살아보고 싶어요.” 그 남자는 내가 여행 다니는 걸 뜻하는 줄 알았다. “여행도 좋고 이왕이면 세계 이곳저곳 살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외교관을 만나셔야겠네요.”그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외교관은 제 스타일 아닌데요? (개인적 취향임)


그 말을 할 때 내게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20대 중반으로 들어서기 전 내 돈 모아 가본 외국이 다였던 내가 해외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내겐 그런 막연한 소망이 있었고 그것이 의외의 사람 앞에 말이 되어 나왔다. 그 말은 씨가 되어 나는 서울과 자카르타에서 결혼을 하고 싱가포르에 한 달 살다가 콜로라도에 정착해서 두 아이를 낳고 살게 되었다.


로키 산에서 낙엽을 할 거야


20대 후반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새로운 거나 배워보자 싶었다. 첫 도전은 스노 보드. 강사로는 남동생을 모셔왔다.


내 삶이 만화라면 “나의 적성을 발견했다!” 며 놀랐겠지. 놀랍게도 나는 보드에서 일어서는 것부터 하지 못 했다. 동생 말로는 역대급이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니 그날 낙엽이라 불리는 펜듈럼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그때 동생이 뜬금없이 말했다.


“로키산 가면 슬로프가 길어서 산꼭대기에서부터 한참을 타고 내려온대.” 그 말을 들으니 한번 가보고 싶어 졌다. 스키장도 처음이고 이제 낙엽을 하는데 나의 꿈이 큰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근데 그런 데는 잘 타는 사람만 가는 거 아니야?” 동생이 말했다. “괜찮아. 낙엽으로 내려가면 어려운 슬로프도 다 갈 수 있어.” “오, 그거 웃긴데? 난 꼭 로키산 가서 낙엽을 할 거야.”


그 말은 또 씨가 되었다. 2016년 겨울 콜로라도 카퍼 마운틴 꼭대기에서부터 보드를 타고 내려올 때 이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난 S턴이 가능했지만 슬로프가 너무 길어서 중간중간에 낙엽 기술을 써야만 했다.


2. 나쁜 말도 씨가 된다


장애아를 낳으면 어떡하지?


난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이라는 걸 하기로 했고 그다음에 고려할 건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결혼한 이상 무시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미국 오기 전 어느 날 언니와 길을 걷다가 2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 같은 자식 태어나면 어떡하냐고 하다가 “장애아 낳을까 봐 무섭기도 하고”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기형아 검사하고 낳는 거지.” 언니 말에 나는 그런 검사도 있냐며 놀랐다. 그때는 내 일이 아니었기에 그건 좀 비인간적인 것 같다는 말만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꽃을 임신했을 때 기형아 검사를 한번 더 접하게 되었다. 주변에 그 검사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안 하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건강한 부부한테서 장애아가 나올 리 없잖아? (나중에 보니 장애아를 둔 대부분의 부모가 건장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 말했던 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좀 못 생겼거나 손가락이 한 개 더 있어서 수술하면 낫는 정도를 예상해서였다. 돈이 있어도 고칠 수 없는 다운증후군은 걱정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꽃은 그렇게 태어났고 “어떡하지?”에 대한 답은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 살다가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면서 장애아 어쩌고 했던 과거의 나, 좀 맞자. 그런 줄 알고도 애들 키우다 힘들면 심한 말 하는 지금의 나도 좀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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